배두나 주연의 일본영화 '공기인형'을 보았습니다. 아직 불편한 몸이 회복된 건 아니지만, 꼭 보고싶던 영화라 부랴부랴 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일본영화라서일까요, 토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로 모이지 않더군요, 게다가 상영관도 조촐해보이고, 취소하는 사람까지...
하지만 전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뭐랄까, 이 영화를 보고는 저도 일본영화에 관심이 많이 갈 정도였으니까요. 어쩌면 배두나가 주연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하 모든 이미지 출처는 구글입니다. 스포일러 없습니다.
일본에서 제작되었지만, 감독이 배두나를 점찍어놓고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하는 만큼 배두나의 모습을 영화 상영시간 내내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배두나가 나오지 않는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공기인형이라는 말은 저도 처음에는 뭘 뜻하는 건지 몰랐습니다. 보통 튜브인형이라고 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아, 더치와이프라고도 하던가요? 하여간 풍선 같은 재질로 몸체를 만들고 거기에 세심하게 만들어진 두상을 붙여 만든 남성용 여자 인형이더군요.
전에 국산 영화 '네 말을 믿으라는 거야'에 마지막 장면에서 한번 튜브인형이 나왔는데 제가 본 튜브인형은 그런 조잡스러운 거라 풍선인형은 다 그렇게 일회용처럼 생겼는줄 알고 있었는데 역시 일본의 인형은 품질이 정말 우수해 보이더군요... 전 단백질 인형(가끔 웹에서 보면 실제 사람보다도 더 생기있고 아름다운 인형들의 사진이 간혹 올라오곤 했죠)의 사진을 보고 놀란 적은 많지만 이번 공기인형에서 공기인형을 보고 놀라기는 처음이었던 거 같습니다...
스초리를 간략하게 요약해보자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공기인형이 어느순간 마음을 갖게 되고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게 되면서 이 영화는 일본영화답게 담백한 느낌으로 흘러갑니다. 그녀는 무심코 집 밖으로 나오게 되고 마주치는 모든 것에 신기해하다가, 우연히 비디오, DVD대여점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낮에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인간다워지고, 대여점에서 일도 하며, 밤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인형 행세를 합니다. 그러면서 대여점에서 함께 일하는 준이치에게 감정을 키워갑니다.
어쩌면, 준이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공기인형인 그녀가 열심히 인간을 배워가도록 만드는 동기가 되는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자신의 몸에 있는 인형의 흔적들을 지우고, 먹을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재치있게 넘기기도 하고, 탄로날까봐 그림자를 피해가며, 인간처럼 살아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꿈 같은 생활은 결국 팔에 상처가 나서 공기가 빠져버리는 바람에 준이치에게 공기인형임을 들키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인간의 삶에서의 모든 경이와 기쁨, 두근거리는 감정의 대가로 슬픔과 아픔, 절망과 고통 또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잔잔하게 진행되던 영화는 굴곡을 그리며 결말로 치달아가죠...
'생명이란 불완전한 것이다... 사람들은 충분히 서로서로 그 불완전함을 완전으로 만들어줄 수 있지만, 다들 스스로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려고 나서질 못하고, 두려워하며 혼자 남겨져 버린다...'
배두나 하면 제 기억에서는 등에 아기를 업고 술집에 붙잡힌 신랑을 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강 스파이크를 날려대던 전직 국가대표 농구선수였던 그녀,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긴장해 버리지만, 결국 마지막엔 괴물을 향해 강렬한 화살을 날리던 국가대표 양궁선수였던 그녀가 떠올랐지요.
이 영화에서의 그녀는 한국의 배우이면서도 일본인, 그리고 인형같은 모습의 세가지 이미지를 절묘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두드러지는 이목구비 때문일까요, 그녀는 일본인들 틈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인형의 모습으로 있어도 왠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인형을 연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요.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의 'AI'에서 로봇을 연기하기 위해 눈을 깜빡일 수 없었던 것처럼, 공기인형에서의 배두나 역시 인형인 척 할때는 눈을 깜빡이지 않더군요. 참 긴 시간동안...
그리고 바람이 빠지거나 공기가 주입될 때, 쭈그러들고 부풀어오르는 묘사까지...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효과도 없이 스스로 대부분을 표현해 내었지요. 물론 완전히 바람빠진 몸은 인형의 몸체로 대신한 곳이 한두군데 있긴 해도...
배두나가 거의 영화의 모든 곳에 나오긴 해도 배두나 외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셋 나오지요. 그리고 그녀와 직접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는 몇 사람...
항상 작은 인형을 들고 다니며 아버지와 함께 보이던 어린 소녀, TV에서 범죄 보도를 적어서는 적당히 각색해서 파출소에 가서 경찰관에게 자신의 이야기인양 털어놓는 할머니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경찰관, 공원 벤치에 언제나 앉아있는 할아버지, 젊고 예쁜 직장동료와 자신을 비교하며 갈수록 힘겨워하는 여인, 여성을 대할 자신이 없어 몰래 훔쳐보거나 가상의 환상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는 청년, 그리고 사과농사를 하는 집에서 계속해서 보내오는 사과 때문에 사과만 봐도 구역질이 나와서 사과를 잊기 위해 온갖 먹을것을 폭식하던 여자...
비단 일본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도시 속 풍경이기도 하지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 제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네요. 그녀의 독백처럼 서로서로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마주잡으면 이 숨막힐 듯한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텐데 말이죠...
그런 도시의 풍경들을 보면서, 저역시 숨막힐 듯이 답답해져 오더군요...
"이 세상에서 오직 너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어, 해줄 수 있니?"
대여점에서 일하는 준이치... 그는 공기인형 노조미와 함께 일하면서, 처음에 정체를 몰랐을 때도, 후에 알게 되었을때도 한결같이 대해줍니다. 노조미는 준이치 덕에 인간으로서 많은 기쁨과 추억을 얻게 되죠. 바다에도 가 보고, 영화도 함께 보고, 식당에도 가 보고...
그녀는 준이치의 말을 종이에 적어 간직하고, 준이치와 영화에 대한 퀴즈도 풀고, 그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함께 있을때의 추억의 물건들을 모으면서 행복감에 젖어갑니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공기인형인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마음이 없는 인형이 되어 줘! 난 인간이 귀찮을 뿐이야!"
공기인형 노조미의 실제 주인 히데오입니다. 혼자 살며 직장에서 힘겹게 일하며 집에 돌아와서는 인형에게 애정을 쏟는 존재입니다... 뭣보다... 그래도 명색이 공기인형 노조미의 주인이자, 영화속에 꽤 비중있는 존재인데, 스틸샷 하나 찾기가 어렵더군요... (특별출연한 오다기리 죠 보다도 비중이 없어!!!)
자신의 옛 여자친구의 이름인 노조미라는 이름을 인형에게 붙여주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인형에게만 관심을 쏟는, 그의 말 그대로 인간을 귀찮아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 인형이나 애완동물, 혹은 아끼는 물건에 인격을 부여하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날이 사람이 무서워져서일까요... 지금의 시대는 옛날과 달리 마음을 열기가 상당히 두려운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마음을 열면 열수록, 마음을 다칠 각오를 해야만 하죠. 저역시 의식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게 되고, 많은 경우 그 거리를 좁혔다가 상처를 받은 경험들이 많아, 차라리 거리를 좁히지 말걸 하는 후회를 수도 없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때는 마음이 다칠 가능성이 많이 줄어드니까 말이죠...
물론 거리를 두는 것에 절 비난하며 떠난 사람도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누군가에게 다가서고, 또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인 거 같습니다...
어쩌면 노조미는 아직 사람에게 상처입은 적이 없기에 누군가에게 다가서는데 망설임이 없었던 걸까요... 그녀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우울한 경험들은 그녀를 어떻게 바뀌게 할지 눈여겨 보게 되는 부분입니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네가 본 세상은, 그저 슬프기만 한 세상이었니? 기쁜 일이나, 즐거운 일은 조금도 없었어?"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영화에서 오다기리 죠가 나오길래 조금 놀랐습니다. 특별출연이었지만, 노조미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고, 그의 분위기에 딱 맞는 역할이더군요... 그의 말은, 노조미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어줍니다. 물론 저에게도...
이 영화를 볼 때 느꼈던 생각은...
이 영화는 판타지 영화라고 생각하는 편이 어떨까요?
저도 모르게 영화를 보면서, '저렇게 될 리가 있나, 너무 어거지네'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실제 일어난 일을 영화화 한 건 아닌데 말이죠. 어짜피 상상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내용에, 저는 왜 그렇게 '현실감 없다'라는 비판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을까요...
일본의 정서를 아시는 분은 더욱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확실히 한국에서라면 말도 안되는 장면들이 나오긴 합니다만, 일본의 경우, 아무리 눈꼴시고 이해하지 못할 광경이나 이상한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참견하지 않는 편이라고 하더군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지나칠 정도라고 할까, 옛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부담을 주면 안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고 한다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영화 속 상황들이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많더군요.
그럼에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는 수상쩍은 아가씨를 첫 대면에 바로 아르바이트로 고용해준다던가, 몸에 있는 이상한 선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없이 화장을 해준다던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현실적인 고증이 있어야 하는 영화는 아니니까요...
일본영화에 좋지 않은 선입관이 가득했던 저인지라 많이 고민하다 선택한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보고나서 참 남는게 많은 영화네요. 솔직히 그 느낌들의 반의 반도 글솜씨 부족한 저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덧...
1. 마지막 스텝롤이 올라갈 때 배두나가 일본어로 가장 먼저 올라갈때는 감회가 새롭더군요... 왠지 닌자 어세신처럼 우리 배우의 이름이 주역을 차지할 때의 기분은 누구나가 같지 않을까 합니다...
2. 그리고 스텝롤을 유심히 보고 있던 이유는 '오다기리 죠' 때문이었습니다. 오다기리는 몰라도 죠는 과연 한문으로 있을까 없을까가 궁금했던 거죠. 그런데... 결국 오다기리 죠의 이름은 한자가 아닌 가타가나로 올라가더군요. 한자이름이 아니었나보네요... 그럼 오다기리 죠는 본명일까요, 가명일까요, 본명이라면 과연 오다기리는 무슨 뜻일까 궁금해졌습니다.
3. 공기인형 자체가 욕구해소용인지라 이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더군요. 제 생각에는 그나마도 일본 원판보다 몇군데 잘려나가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잘려나간 부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중요한 내용이 있는 곳은 아니겠죠), 만약 관객 확보를 위해 청소년 등급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잘라내야 할까 생각해보니...
청소년 관람불가 외에는 영화 상영시간이 1/3은 줄어들 거 같더군요...
4. 욕구해소 장면도 나오고 배두나의 나신도 자주 나오지만, 그런 장면들을 하찮게 만들어 버리는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었으니... 준이치가 노조미의 몸에 입김을 힘껏 불어넣는 장면... 자신의 몸에 가득한 준이치의 입김에 행복해하고, 그 입김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숨을 내쉬는 것조차 기겁하며 막고, 방에서 즐거이 떠오르며 기뻐하며, 자신의 몸에 더이상 펌프질을 못하도록 펌프를 몰래 버리는 것까지...
자신의 몸을 비춰보며 그 안에서 대류하는 공기를 바라보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5. 왜 우리 주위의 모든 존재는 인간이 되고 싶어할까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그들이 인간의 삶을 경험하면서 나날이 행복해하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너무 흔하게 경험해서 이제는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상적이고 식상한 행복들입니다. 마치 무심히 밟고 지나가버리는 세잎클로버처럼 말이죠...
그런 장면을 볼때마다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것은 설경구, 문소리의 우리 영화 '오아시스'입니다. 장애가 있어 스스로 움직일수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도 없는 문소리가,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설경구와 휠체어에 탄 채 가끔 밖에 나갈 때, 단 두번 마치 환상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나, 설경구와 '보통의 연인들이 늘상 하는 평범한 행동'을 하는 환상에 젖는 장면이지요. 보통 사람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단조로운 일상이, 그네들에게는 눈물겹게 간절한 소망이듯이...
노조미에게는 보통 사람들처럼 음식을 먹고,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많은 사람들 속에, 마음껏 케이크의 촛불을 향해 입김을 불어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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