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가 [반칙왕]입니다. 언제나 상사에게 헤드락 걸리고, 은행이라는 조직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한 소시민에게 프로 레스링이라는 인생의 이벤트를 유머와 함께 잘 그려낸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한번쯤 나의 지겨운 인생 확 바꿔버릴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원했을 때 봐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스크린 속에 등장한 그를 보니 마치 임대호의 백수 버젼이 딱 이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리저리 살펴보게 되더군요. [라이터를 켜라]의 주인공 백수왕 허봉구를 소개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낙하의 법칙에 충실했던 기왓장에 머리를 두들겨 맞고도 멀쩡한 정신으로 먹는 거에 계속 집착하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준 허봉구. 그의 현재 직업은 나이 30인 백/수/. 예비군 훈련 가려고 아버지 주머니에서 몰래 만원짜리 꺼내다가 맞고, 얼마 없는 돈으로 겨우 산 점심은 왠 깡패 같은 놈 때문에 엎어버렸고, 허기를 달래려고 청했던 잠이 지나쳐서 재훈련 통지를 받는 정말 불쌍한 주인공입니다. 이런 불쌍한 그의 인생에 또 한번 들어온 거대한 태클! 아까 점심을 엎었던 그 깡패가 이번엔 전 재산을 들여 산 300원짜리 일회용 라이터를 가져가서는 안 내놓는 겁니다!! 지가 깡패두목이면 다야?! 드디어 뚜껑 열린 허봉구, 양철곤을 쫓아 부산행 기차에 오릅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기필코 라이터를 뺏겠다는 일념으로 쫓아가는데 과연 라이터는 누구의 손에?
제가 아는 사람은 “말도 안돼. 겨우 300원짜리 라이터 하나 때문에 저렇게 난리를 친단 말야?”라고 했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궁하면 또 정신적으로 한계치에 도달하면 단돈 10원으로도 얼마나 사람 변할 수 있는지 아직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렇죠. 전 허봉구 심정 이해가 가더군요. 정말 한심한 인생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디에서나 치이고 놀림 당하고... 그동안 쌓여왔던 게 그 라이터 하나 때문에 폭발한 거죠. 사람이 나사가 빠져버리는 거 의외로 아주 사소한 계기로 그럴 수 있거든요. 그건 양철곤 역시 마찬가지죠. 자기 몫을 안 주고 이용만하고 버릴려는 박의원에 대한 분노가 기차를 납치할 정도로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한거죠. 서로 너무 비슷했던 그들이기에 300원짜리 라이터지만 그들에게는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그 이상으로 가게 만든 게 아닐까요.
[라이터를 켜라]는 영화의 끝만 조금 더 현실성 있었다면 정말 좋은 블랙코미디 영화가 될 수 있었는데 앞부분에서 잘 끌어가던 영화가 정작 절정부에 이르러서는 맥없이 풀어져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이야기를 잔뜩 풀어놓고 그걸 매듭을 못 짓는 고질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약점에도 영화는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상황 설정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를 맛깔스럽게 만들어줬거든요. [신라의 달밤]에 이어서 또 다시 코미디 영화에 도전한 차승원은 이제 어느 수준에 도달했다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김승우. 정말 허봉구 그 자체였습니다. 코미디라서가 아니라 김승우가 나온 영화 중에 가장 재밌었어요. 이런 주연들을 잘 받쳐준 조연들은 영화에 있어서 주변 캐릭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 시켜주는 산 증거였습니다. 다만 도대체 그 가치를 모르겠던 김채연의 캐릭터만 빼면요. ㅡㅡ^
[라이터를 켜라]는 틈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그런 영화였죠. 그러나 그런 점을 무시하고 제가 즐겁게 볼 수 있었던 건 소시민의 일상 탈출기를 재밌게 잘 그려낸 덕이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던 [반칙왕]과는 그 결말의 색깔이 사뭇 다른 모습이지만 임대호나 허봉구나 짧은 시간동안 그들이 겪은 사건이 그들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정이 갔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랜만에 배우나 감독이 아닌 박정우 시나리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영화였습니다. [마지막 방위],[키스할까요?],[주유소 습격사건] 그리고 [라이터를 켜라] 다음엔 어떤 코미디를 보여줄지 기대되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