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자유가 있기에... ★★★☆
산악인에게 ‘왜 당신은 산을 오르십니까?’라고 물어보면 ‘그 곳에 산이 있기에’라고 답한다고 했든가. 세계적인 외줄타기 곡예사 필리페에게 ‘왜 당신은 외줄타기를 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그곳에 자유가 있기에’라고 대답할 것만 같다. 무슨 말이냐면 높은 곳에서 외줄을 타는 건 필리페에겐 일종의 운명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필리페가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에서 벌인 외줄타기 곡예의 성공사(?)를 그리고 있는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는 배우에 의한 재연 화면과 당시 촬영된 자료 화면, 그리고 최근 촬영한 실제 인물의 인터뷰 화면이라는 세 가지 소스로 구성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일요일 MBC에서 오전에 하는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확장 버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형식만이 아니라 재미에서도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맨 온 와이어>는 다큐멘터리치고는(?) 일종의 스릴러 영화를 감상하는 듯한 재미를 쏠쏠하게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이런 부분, 그러니깐 극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안겨주는 게 <맨 온 와이어>의 가장 큰 장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확실히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최고 흥행작인 <워낭소리>의 논란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워낭소리>가 한창 흥행가도를 달릴 즈음, 과연 <워낭소리>가 다큐멘터리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엔 연출이 너무나 극영화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워낭소리>를 돌이켜보면, 슬플 수밖에 없는 장면 후에 눈물을 흘리는 소의 큰 눈망울을 클로즈업한 화면을 붙여 놓는다. 보는 관객은 소가 앞선 장면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 믿고 영화를 보겠지만, 실제 소가 그 장면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인지, 아니면 우는 장면을 편집해 붙인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실제로는 워낭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화면엔 끊임없이 ‘딸랑딸랑’하는 워낭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려 있다는 것도 <워낭소리>가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무명배우가 출연한 극영화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워낭소리>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맨 온 와이어> 역시 동일한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군 생활을 해 본 사람은 모두 동의하겠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이라 해도 실제 경험보다 더 포장되어 일종의 영웅담이 재생산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과대 포장된 경험을 실제 자신의 경험으로 인지하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러니깐 필리페 등 출연 인물들의 회고에 기반한 재연드라마가 진정 실제 그 자체와 동일하겠느냐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건(그리고 틀릴 수 있다는 것도 포함해) 다큐멘터리로서는 큰 결격 사유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밌는 건, <맨 온 와이어>의 극영화적 연출은 거의 문제되지 않을뿐더러 인지하는 경우에도 대체로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긍정성은 어찌됐건 필리페라는 실존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적 건물들의 옥상에서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긴 작대기 하나만을 의지해 죽음을 건 외줄타기를 했으며, ‘왜 그런 걸 하지?’라는 자연스런 의문과는 별개로 줄을 타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움과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맨 온 와이어>의 극영화적 연출은 자칫 평이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듦으로써 관객이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드디어 첩보 영화같은 약간의 속임수 등을 동원해 새로 만들어진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진입한 이들 일당은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 새벽 여명이 밝아올 때 두 건물의 옥상에 줄을 연결하는 데 성공한다. 출근길 뉴욕 시민들의 놀라는 표정 위로 새가 하늘을 날 듯 자유로운 몸짓의 필리페가 쌍둥이 건물을 걸어 다니는 장면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장면에선 약간의 슬픔이 묻어난다.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영화 볼 당시엔 무심코 지나갔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건 어쩌면 세계무역센터의 비장한 운명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심하리만치 필리페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외줄타기 무대였던 세계무역센터의 운명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선 아무리 외면하려해도 거대한 비행기가 부딪치던 무역센터의 마지막이 선명히 겹쳐져 떠오른다. 역사적 해석 여하를 떠나 수천 인명의 희생 앞에서 숙연해지고 슬퍼지는 게 바로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필리페가 아닌 세계무역센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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