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피터 잭슨 감독은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를 문제적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은 데뷔작 <고무인간의 최후>나 <데드 얼라이브>는 물론이요,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킹콩>에 이르기까지, 그는 현실적인 드라마 속에서 노는 것을 즐겨 하지 않았다. 그가 만든 유일한 '드라마'인 <천상의 피조물들> 역시 리얼리티에 기반하기보다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심리를 강렬하게 펼쳐놓았었다. 대신에 그는 현실보다는 상상 속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능하다. 머릿속에 감만 잡히지 실체는 그려지지 않는 상상을 스크린 속에 치열하게 담아낼 줄 안다. 그 영화화 하기 힘들다던 원작을 소름끼치게 살아숨쉬는 영화로 만들어놓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그랬고, 어릴 적 어색하게 가슴만 치던 거대고릴라의 모습에서 벗어나 수차례 관객의 심박을 들었다놓는 파워를 지니게 된 <킹콩>이 그랬다.
그런 그가 매우 오랜만에 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스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적잖이 놀랐다. 밋밋한 영화를 내놓은 적이 없었던 그가 평범한 가정에 일어난 살인사건이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니. 더구나 원작 소설을 이미 오래 전에 읽었기에 의외다 싶은 느낌은 더욱 강했다. 적어도 짐작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내놓을 영화 <러블리 본즈>는 소설보다는 어딘가로든 더 강렬하게 나아가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그런데 영화로 만난 <러블리 본즈>는 생각보다 모호한 위치에 서 있다. 삶의 세계보다 죽음 이후의 세계와 그 세계에 있는 영혼에게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이 영화는, 섬뜩한 듯 아름답고 환상적인 듯 현실적인 영화다.
1973년, 수지 새먼(시얼샤 로넌)이라는 14세 소녀가 이웃집 남자 조지 하비(스탠리 투치)에게 잔인하게 강간 살해당했다. 꿈 많고 발랄한 소녀는 한 순간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승과의 인연이 끊어진 채 죽음의 세계로 내몰렸다.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에 마음을 쉽게 추스르지 못하는 수지는 이승을 떠나서도 계속 이승을 내다본다. 한없이 단란했던 가족 - 아빠 잭(마크 월버그), 엄마 애비게일(레이첼 바이스), 동생 린지와 버클리, 외할머니(수잔 서랜든) - 은 순식간에 절망의 늪에 빠진다. 어딘가에 있을 수지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그리고 범인을 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시작부터 주도면밀했던 하비는 그들을 기만하듯 잘도 빠져나간다. 자신이 떠난 뒤 남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뭐라도 해주고 싶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속이 타는 수지.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관계 속에서 이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의 상처의 근원을 확실히 밝혀내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의 사랑으로 하루빨리 상처를 봉합하는 것일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이별을 맞게 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다 보니 이 영화는 피터 잭슨이 만든 영화들 중 참 오랜만에 '배우들의 연기를 위한 영화'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예상은 다소 빗나갔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는 준수하다. 마크 월버그와 레이첼 바이스는 딸을 끔찍한 방식으로 잃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힘들어 하는 부모의 모습을 빼어나게 보여줬고, 외할머니 역의 수잔 서랜든은 등장 비중이 많지는 않지만 헐렁한 듯 정곡을 뚫고 있는 캐릭터로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모든 것을 잃은 절망감과 여전히 간직하고 싶은 소녀의 감성이 혼재하는 시얼샤 로넌(수지 역)의 연기와 오버하지 않아도 눈빛과 약간의 표정변화 만으로 그가 얼마나 사악하고 무자비한 놈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스탠리 투치(하비 역)의 연기는 출중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이렇게 쟁쟁한 배우들의 연기 경연대회라도 벌이듯 치열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를 통해 희노애락의 감정을 관객들로부터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일부러 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전하는 감정은 기쁨이면 기쁨, 슬픔이면 슬픔이라고 확실히 단언할 수 없는, 여러가지가 섞이고 어우러진 복잡다단한 감정이다. 사실 피터 잭슨은 이전부터 영화를 통해서 이렇게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곧잘 했다. <데드 얼라이브>에서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상하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고, <반지의 제왕>에선 스릴 넘치는 판타지 모험물의 외형 속에 은근히 소름끼치는 호러적인 이미지를 심어넣었고, <킹콩>에선 괴수들의 격돌을 지켜보며 심장 벌렁벌렁하게 하다가 어느 순간 괴수와 인간의 로맨스라는 말도 안될 것 같은 소재로 애잔한 감정을 탁월하게 전달했었다. <러블리 본즈>도 그러한 피터 잭슨의 취향에 있어서 어쩌면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때론 스릴 있고 섬뜩하다가도 때론 너무 아름답고 찬란하며, 때론 먹먹하게 가슴을 저민다. 그만큼 영화는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방향을 잡고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물론 이것도 넘보고 저것도 넘봤다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됐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감독이 영화의 이야기와 세계관을 내외적으로 형상화한 결과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선 이미지에서만 봐도 이런 성격이 두드러진다. 영화에는 이승과 저승 두 세계가 등장하는데 이 두 세계의 분위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완벽한 세계에 갇힌' 수지의 모습을 반영하듯 천국의 모습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화려하고 광활한 이미지들로 가득 채울 수 있다. 수지가 잠시 걱정을 잊고 친구와 마음껏 뛰놀 때 펼쳐지는 화사한 풍경들, 아빠와 함께 만들던 병 속 범선들이 가득 메운 해변의 모습 등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 하는 저승의 이미지는 벅차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다. 심지어 수지가 절망에 가득차 세계가 어둡고 음산해져도 찝찝한 리얼리티보다 특징적 이미지들(등대, 옥수수밭, 하비의 집 등)이 지배하는 강한 카리스마가 곳곳을 뒤덮는다. 그곳에는 다른 차원의, 지극히 개인적인 세계인 만큼 이곳의 모습은 사실성보다 현대 미술작품이 살아 움직이는 듯 막연하고 기이한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반면, 화면의 질감까지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 70년대의 복고적 분위기를 꽤 사실적으로 옮겨놓은 이승 세계엔 불쾌한 리얼리티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수지가 어렸을 때부터 유독 기억에 남았던 쓰레기 매립장, 하비가 계획적으로 만들어놓은 토굴의 음침하고 끈적한 분위기,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 하비 주변의 참혹한 광경 등 피터 잭슨 특유의 악취미적인 기질이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듯 하다. 이렇게 영화는 영상에서부터 수시로 황홀한 아름다움과 사실적인 찝찝함을 마구 오가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영화의 성격이 확실히 드러나는 또 다른 부분은 세계관의 구현이다. 원작은 죽음의 세계에 들어선 소녀를 화자로 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했지만 전반적으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후에 상처와 부딪치고 갈등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잔잔하고 담담한 휴먼드라마의 성격이 강했다. 반면, 영화는 차분한 원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붕 떠 있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원작의 감성적 무게를 기대하고 영화를 본 사람에게 적잖은 실망감을 안길 수도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시선을 살짝 바꾼 감독의 해석이 낳은 영화만의 분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과 약간 달리 영화는 소중했던 사람을 잃은 이들이 아파하고 분노하다가 치유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따라가기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놓인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 어떤 구조를 지니며 흘러가는가에 더 집중하는 듯 하다. (원작에는 꽤 자세히 묘사된 수지의 죽음이 영화에선 지극히 암시적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넘어가면서부터 영화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흩어놓는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영화는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영화는 무심하게 흘러간다. 가족이 범인을 잡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만들기 위해 극적인 상황을 곳곳에 배치하지도 않고, 그저 함께 해 줄 줄 알았던 가족들은 예상과 달리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원작에서도 그렇지만 일부러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듯한 영화의 흐름은 이 부분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러블리 본즈>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꽤 많은 시간동안 배경음악을 깔아놓는다. 물론 관객들의 감정을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음악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일관되게 몽환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깔아놓는다. 음악 사용을 최대한 자제해 관객들에게 영화 속 상황의 사실성을 더욱 잘 전달하려는 것과 완전히 배치되는 방식이다. 곁에서 지켜보듯 몰입하기보다는 마치 어렴풋이 보이는 꿈이나 잡히지 않는 환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반대로 음악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몇몇 장면 - 린지와 하비의 대치 구도 등 - 은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의 긴장감을 안긴다) 이것은 이 영화가 어디까지나 이미 세상을 떠난 수지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데서 오는 결과다. 이미 저 세상에 있는 수지의 내레이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영화는, 그렇기에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삶도 어렴풋이 미소 짓게 만드는 추억처럼 그려내고, 들여다 보고 있는 현재 가족들의 모습 또한 보이지만 만질 수는 없는 모호한 환상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은 이 영화로 하여금 관객에게 사실적인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죽음 이전과 이후의 세계가 공존하는 영화 속 세계관의 환상성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학적으로 따지면 '의도적인 거리 두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몽환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는 가족과 주변인들의 모습 또한 생각보다 담담하다. 사랑했던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는 말할 수 없이 분개하여 미친 듯이 그 뒤를 쫓고, 누군가는 어서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을 숨기고, 누군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나가려 하지만 영화는 이들에게 굳이 동정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여전히 삶은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흘러가는 시간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렇게 무심한 듯한 시간을 수지는 이승의 건너편에서 애처롭게 지켜볼 뿐이다. 결국 가장 불안한 인물은 수지가 되고, 아픈 상처로 인해 갈등하고 이를 어느덧 담담하게 치유하는 가족들의 모습보다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겪는 온갖 감정들의 충돌을 세계의 변화로 고스란히 이미지화시키는 수지의 모습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다. 수지의 세계 자체가 수지인 거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수지의 죽음 이후 아픔과 극복을 거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라기보다, 죽음 이후의 세계로 온 수지가 세상과의 끈을 놓고 자유로워지기까지의 이야기에 가깝다. 가장 행복한 때로 다가서려던 순간, 죽음의 순간마저도 자신이 정말 죽는지 실감을 못할 만큼 갑작스런 죽음을 만난 소녀에게 하루아침에 이승의 모든 걸 놓고 천국으로 가는 것은 오히려 더욱 힘든 일이다. 그녀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미루고 시시각각 변모하는 자신만의 중간 세계에 머물며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살인자를 지켜보지만 그녀가 아무리 소리치고 애달프게 바라봐도 결코 그들의 삶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자신이 그토록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소녀는 어쩌면 가족들은 다 함께 슬퍼하고 분개하고, 살인자는 하루라도 빨리 처단되길 바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극심한 감정의 격랑을 겪은 뒤에 결국 소녀는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음을 깨닫는다. 연어가 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 애를 써도 강물은 무심하게 흘러가듯이. 결국 슬픔과 분노와 두려움을 한껏 겪고 난 소녀는 어느덧 그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진다. 점차 상처가 아물어가고 잠시 잃었던 유대감을 되찾는 가족들의 모습은 오히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자유롭게 한다. 공평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국 누군가는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루게 되고, 누군가는 아파한 만큼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을 맞는다. 그리고 비로소 삶과 죽음은 어느 것이 우월하다 할 것 없이 고요한 지평선 위에 함께 놓이게 된다.
이처럼 <러블리 본즈>는 소녀의 죽음을 통해 가족과 친구들의 유대도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 삶과 죽음의 유대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죽음 이후의 세계도 삶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동양적인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정말 실감나는 사실성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피터 잭슨이 이전에 보여줬던 손에 잡힐 듯 실감나는 장면들을 만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대신에 영화는 죽음의 세계에서 삶을 바라본다는 것이 대충 어떤 느낌일지를 현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가 품은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매우 긴 시간의 단위에서 봤을 때, 삶은 죽음의 시간에 비하면 시의 한 구절처럼 '소풍'이나 다름없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수지 역시 자신의 삶과 죽음을 일러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 영원히 떠났다'고 얘기한다. 수지에게 삶의 모습은 잡힐 듯 잡히지 않게 아련하지만 행복하다. 원래 소풍이라는 게, 낯선 곳이라 어디가 어딘지 몰라 정신이 없지만 행복한 기억이 아니던가. 이렇듯 삶은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때문에 사람에 따라 일관된 평가를 받지는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이어짐이 먹먹하면서도 눈부시게 다가왔다.
+ 피터 잭슨의 인장이 영화 곳곳에서 목격된다. 초반 서점 장면에선 '반지의 제왕' 책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전시되어 있고, 중간에는 감독 자신이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니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참고로 그는 수염은 그대로지만 살이 무지하게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