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는 전세계에 전해 내려오는 귀신들 중 가장 섹시하다고 할 만하다. 이야기 속의 뱀파이어들은 웬만하면 다 조각미남 또는 미녀들이고, 창백한 피부는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하면서 섹시함과 보호본능을 동시에 일으킨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의 피를 빨기 위해 목덜미를 덥석 물며 취하는 자세는 또 어찌나 관능적인지. 그 관능적인 순간 송곳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의 이미지는 현실에 억압된 이들에게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일탈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하다. 이런 뱀파이어 캐릭터로부터, 로맨스를 떠올려보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스테프니 메이어의 소설 <트와일라잇> 시리즈이고 이것은 곧 소설 뿐 아니라 영화로도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다.
조각같은 이목구비와 날렵한 몸매의 소유자, 창백한 피부가 섹시함과 보호본능을 동시에 일으키면서, 훈련받았다고는 하지만 언제 나의 목덜미를 물지 모르는 위험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나만은 목숨 바쳐 사랑해주는 존재. 현실에선 쉽게 넘볼 수 없는 극단적이면서도 매력적인 판타지를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와중에도 훌륭히 충족시키면서 전세계의 여성 독자(또는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영화는 1편 <트와일라잇>이 나온지 딱 1년 만에 2편 <뉴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1편에 이어 2편까지 보고 나면, 이 시리즈의 분명한 특징을 알게 된다. 우리가 TV에서 숱하게 보던 10,20대를 위한 트렌디드라마의 전개, 딱 그거다.
1편에서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이어갈 수 있게 된 뱀파이어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인간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둘은 시간이 흐르며 변해갈 자신들의 모습에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다. 에드워드는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것이고, 벨라는 언젠가 노인으로 변해갈 상황 말이다. 아픈 현실과 앞으로 다가올 위험이 행여 벨라에게 해가 될까 두려운 에드워드는 벨라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결국 에드워드는 붙잡는 벨라에게 모진 이별을 고한다. 수개월을 힘들어 하던 벨라는 위험한 순간에 에드워드의 영혼이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것을 깨닫고 오토바이를 타거나 절벽다이빙을 하는 등 위험한 일들에 다가선다. 그렇게 혼란스러워 하는 벨라에게 이웃 친구 제이콥(테일러 로트너)은 더없는 위로가 되어준다. 그렇게 제이콥과 점점 가까워지던 벨라는 어느 날 제이콥이 늑대인간 혈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숙적 관계인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사이에 놓이게 된 벨라는 갈등하는데, 그 와중에 컬렌 가문의 앨리스(애슐리 그린)가 찾아와 벨라가 죽은 줄 아는 에드워드가 자기 잘못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목숨을 끊기 위해 뱀파이어계의 터줏대감이자 심판자 역할을 하는 볼투리 가문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전한다. 벨라는 에드워드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볼투리 가문의 위력은 만만치 않은데, 과연 그들의 사랑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전편의 배우들이 그대로 등장하지만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주는 몇몇 배우들이 있다. 사실 에드워드 역의 로버트 패틴슨은 시크한 뱀파이어 역할이라는 게 발성이나 감정 표현에 있어서 그렇게 뛰어난 연기를 요하는 캐릭터가 아니고 이러한 특징은 이번 편에서도 일정하게 유지된다. 매력적으로는 보이겠지만 연기력이 뛰어나진 않다. 반면 벨라 역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아무래도 역할이 전편에 비해서 이별과 재회 등으로 인해 극적인 감정변화를 겪다보니 이를 표현하는 장면이 많은데, 악몽을 꾸는 장면이나 방황하는 장면, 에드워드를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는 장면 등에서 비교적 적극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아마도 이 영화에서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가장 고생을 많이 한 배우일 것이다. 제이콥 역의 테일러 로트너는 1편에서의 단역에 가까운 비중을 뛰어넘고 이번 편에서 주연급으로 비중이 급상승하는데, 그런 만큼 1편에서 어중간하게 비쳐졌던 매력을 이번 편에서 확실히 보여준다. 1편 전체와 2편 초중반에서 살짝 피식거리게 되는 청순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다 중반부를 넘어가며 보여주는 그의 변신은 '역시 남자는 머리빨이구나'하는 생각이 들 만큼 괄목상대할 만하다. 1편에선 잠시 겉절이급으로 등장하던 캐릭터가 2편에서는 서브남자주인공급으로 성장하면서 에드워드와도 당당히 매력 경쟁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볼투리 가문의 비중이 생각보다 너무나 적었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 제작 전 캐스팅 부분에서는 기존의 배우들 못지 않게 볼투리 가문에 캐스팅된 마이클 쉰이나 다코타 패닝 등에 대한 소식도 많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무색할 만큼 그들의 비중은 특별출연급이다. 특히 제인 역의 다코타 패닝은 역할이 매우 미미해서, 중간중간 역시나 무시할 수 없는 포스를 보여줌에도 그것이 오히려 너무나 안타까울 정도이다. 이는 후반부 볼투리 가문과의 대립각이 기대보다 날카롭지 못해서 클라이맥스 부분의 긴장감이 다소 떨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등 판타지 요소가 등장하는 영화인 만큼 어느 정도의 액션 또한 기대된다. (예고편 또한 그 기대를 더 증폭시킨다.) 결과적으로 <뉴 문>은 액션 장면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지만,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몇몇 장면에서는 액션 장면 특유의 박진감이 비교적 잘 살아 있다. <황금나침반>을 통해 의견이 분분한 완성도 가운데에서도 북극곰들의 일대일 격투라는 나름의 명장면을 만들어낸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늑대들의 중량감 있는 격투 장면을 타격감을 살려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1편에도 등장했던 악당 빅토리아(레이첼 르파브르)와의 추격전이나 후반부 볼투리 가문과의 육탄전 등에서는 무협영화를 연상케 하는 속도감과 절도를 보여준다. 이 영화를 판타지 영화로 알고 왔을 관객들에게 이 액션 장면들은 비중이 많진 않지만 이 영화의 볼거리로서 일정한 기능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 전체가 다 그렇겠지만, <뉴 문> 역시 호불호가 매우 갈릴 영화다. 이것은 이 영화가 실험적이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고, 대규모 상업영화이면서도 그 타겟을 너무나 명확하게 정해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타겟층은 비교적 만족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당황스러워 할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의 타겟은 아마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여성 관객들로 생각된다. 과묵하고 살짝 까칠한 듯 한데 막상 다가가면 너무나 다정하고 한없이 베풀어주고, 불의에 처했을 때 주저없이 구해주는 흑기사 정신에 행여 자신 때문에 피해가 갈까봐 때론 거리도 두려 하는 감질맛도 낼 줄 아는 나쁜 남자 스타일. 우리나라에서 이미 '구준표'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된 이 캐릭터는 이 시리즈에서 '에드워드'라는 이름으로 재현되면서 많은 여성 관객층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선사하는 판타지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이들의 사랑은 최대한 극적이고 애절하게 표현된다. 오프닝에서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인용하며 그들의 사랑이 이에 못지 않게 안타깝고 간절한 사랑임을 부각시키고, 벨라가 죽은 줄 알고 따라 죽으려는 에드워드의 모습 또한 로미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서로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두 사람의 행동은 거침이 없고, 그들이 만난 순간 서로 주고받는 대사는 천천히 음미할 새도 없이 감성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대사들이다. ('네가 숨쉬는 것만으로도 내겐 가장 큰 선물인걸', '넌 내가 살아있는 이유야', '다신 널 저버리지 않을게' 등등)
그러나 두 사람 간의 사랑은 판타지는 충족시키되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을 잃어버리는 법. 영화는 이들 사이에 또 한 사람을 끼워넣음으로써 삼각관계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가 바로 제이콥이다. 흔히 트렌디 드라마에서 메인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한창 투닥거리다 감정이 싹트고 사랑에 빠지면, 양념처럼 보이던 서브 남자주인공이나 여자주인공이 사이에 끼어들며 새로운 매력을 과시하며 관계를 흔들어놓는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한 편의 드라마 시리즈로 봤을 때, <뉴 문>이 딱 그 부분의 역할을 한다. 이 영화에서 에드워드는 정작 상당 부분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혼으로만 띄엄띄엄 등장할 뿐. 대신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1편에선 별 비중 없었던 이웃집 친구 제이콥이다. 그저 이웃집 친구 또는 동생으로만 여겨졌던 제이콥이 이번 편에서는 이별에 힘들어하는 벨라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에드워드처럼 우아하고 조용하기보다 투박하고 활발하지만, 매사에 벨라를 위하는 마음이 들어있는 제이콥의 모습에 벨라는 어느 순간 호감을 느낀다. 에드워드를 한시도 잊을 수 없으면서도 제이콥의 색다른 모습에 점점 끌리게 되는, 탁월한 어장관리의 순간이다.
이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외부 상황만 따라준다면)안정적으로 흘러가던 사랑이 삼각관계로 변하면서, 트렌디드라마를 보는 듯 익숙한 극적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이와 동시에 관객은 벨라의 입장이 되어보면서 조각미남 뱀파이어와 몸짱남 늑대인간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남자 관객 입장에서는 결단력을 보이지 못하고 한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정도로 속이 빤히 보이는 어장관리를 일삼는 여자주인공이 마냥 호감으로만은 비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여자 관객 입장에서는 이만큼 좋은 감정이입의 대상도 흔치 않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여담이지만, 서브 남자주인공인 제이콥 이외에도 서브 여자주인공이라 할 만한 앨리스도 꽤나 매력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속사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형적 애정관계과 이야기 전개를 띠고 있다고 해도 그 포장(대사, 시각적 묘사)이 그럴싸하다면 남녀 불문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쉽게도 포장까지 세련되게 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일단 앞서 얘기했듯 사랑을 과시하기 위해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대사가 대놓고 손발을 수축시킨다. 더불어 주인공들의 매력을 부각시키는 부분도 다소 어설픈 감이 없지 않다. 에드워드를 비롯한 뱀파이어 혈족의 외모 묘사 부분은 이상하게 전편보다 분장이 떠 보여 허술한 느낌을 주고, 제이콥은 몸짱임을 과시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시도때도 없이 벗고 다녀서 때론 살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톡 까놓고 보면 별 것 아닌 뻔한 이야기라도 그 표현에 심혈을 기울이면 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 문>은 기존의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열혈 독자들, 또는 영화의 팬이라면 여지없이 빠져들 매력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들이 펼쳐가는 사랑의 판타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황당하고 낯간지럽게 다가올 수 있겠지만, 우리가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환상을 확실히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며, 배우들의 매력도 거기에 어느 정도 부응한다. 나의 입장에서 이 영화가 마냥 만족스러운 영화는 아님에도 이 영화를 어느 정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건, 이와 같이 내가 속하지 않은 다른 관객층이 원하는 바를 꽤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하고, 다른 데 한눈 팔지 않고 이를 정직하게 공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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