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시간 내내 손발이 오그라든다...★★
대체 원작소설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기에 번역본이 무려 두 권으로 발간되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선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서사, 상영시간 내내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만드는 이 간지럽고 비현실적인 로맨스만으로 그 두터운 소설이 이루어져 있다고는 믿기질 않는다.
아무튼 스토리를 살펴보자면, 20살의 클레어(레이첼 맥아덤즈)는 어느 날 우연히 도서관에서 헨리(에릭 바나)를 만난다. 그러나 클레어가 여섯 살 때부터 종종 만나왔던 헨리는 클레어를 알아보지 못한다. 왜냐면 몇 년이 흐른 뒤에야 헨리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 여섯 살의 클레어를 만나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헨리에게 그 동안 둘의 인연에 대해 말해주며, 사랑에 빠진 둘은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예고 없이 시간여행을 떠났다가 예고 없이 돌아오는 헨리를 기다리며 클레어는 시간여행자 아내로서의 삶이 점점 힘들어짐을 느낀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표정을 레이첼 맥아덤즈만큼 사랑스럽게 표현하는 여배우를 본다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시간여행자의 아내>에서의 레이첼 맥아덤즈의 표정과 연기는 도저히 현실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시간여행자와의 로맨스가 마치 현실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환각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에릭 바나의 매력도 이 영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겐 충분한 값어치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매력은 배우를 감상하는 것 말고는 찾기가 힘들다. 엄마와 차를 타고 가다 사고 직전, 헨리의 시간여행은 시작된다. 당연하게도 뚜렷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며,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것이란 추정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유전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과학적이거나 이론적으로 가능한 설정만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아무리 엉터리 같은 설정이나 근거라고 해도 최소한 영화 내에선 동일하게 작동되고, 동일한 틀에 맞춰 작동되어야 한다.
헨리와 클레어가 사랑에 빠지는 계기는 클레어가 ‘나는 당신과 이미 수차례 만났다’라며 접근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랑은 헨리가 여섯 살의 클레어와 만날 때 시작된다. 그런데 헨리가 과거로 돌아가 여섯 살의 클레어를 만났을 때엔 이미 성인이 된 둘은 사랑하는 사이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니깐 둘의 사랑이 클레어에게는 여섯 살에 시작하지만, 헨리는 28살에 시작하며, 헨리가 과거로 돌아가 여섯 살의 클레어에게 사랑을 느끼도록 또는 사랑의 느낌을 전달했기 때문에 어린 클레어의 마음에 헨리가 그리움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즉, 둘의 사랑은 일종의 순환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는 로리타 콤플렉스의 변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여섯 살에 만나 손을 잡은 남자를 평생 사랑한다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설정도 그렇다 치자. 더 문제는 시간여행과 관련한 장치들이 영화 내에서조차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래에서 복권 번호를 알아내 과거로 돌아와 맞춤으로서 부자가 된다는 건, 시간여행을 통해 사건에 개입하며, 변형시킬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죽음과 관련해서만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며 무기력해 지는 것일까? 타인에게 경고하듯이 엄마에게 경고할 수는 없을까? 헨리는 그저 무력해하며, 도저히 그 시간에 맞춰 가지 못했다는 말로 자신을 변호할 뿐이다. 그렇다고 하면 어느 정도 시간여행의 컨트롤이 가능한 손녀가 가서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이전에 딸은 왜 아빠의 죽음을 경고만 하고 막지는 못하는 것일까? 아니,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헨리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는 것일까?
물론 이 영화의 ‘스스로가 통제하지 못하는 시간여행’이란 기본 설정 자체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이런 설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재밌긴 하다. 갑자기 늙어버린 남편과 결혼한다든가, 현재의 남편에 대한 불만을 젊은 시절의 남편에게 털어 놓고 사랑을 나눈다든가 하는 장면은 영화의 분위기를 떠나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문제는 이런 에피소드들이 다분히 병렬식으로 나열된다는 것에 있다. 그저 열심히 에피소드만 쫓다보니 어느새 영화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리고는 울라고 강요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서 별로 슬픈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헨리의 죽음이 영원한 이별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무수히 많은 헨리들-10대의 헨리, 20대의 헨리, 30대의 헨리, 40대의 헨리, 기타 무수한 시간대의 헨리-이 여기저기서 시간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며, 영화에서처럼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는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고, 영원히 클레어의 주위를 맴돌 것이다. 이건 단지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영원한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말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시간여행’을 ‘희귀한 불치병’으로 놓고 보면 문제는 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아니 원작소설이) 언제 죽을지를 미리 알고 있는 고칠 수 없는 희귀 불치병 환자와 그의 배우자에 관한 이야기를 판타지하게 꾸민 것인지도 모른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한 사랑을 그리는 판타지 로맨스는 헐리웃과의 조합이 아니라, 일본 영화와의 조합이 더 어울리는 짝인 것 같다. 최근에 본 <미래를 걷는 소녀>라든가 <지금, 만나러 갑니다> 또는 일본 영화는 아니지만 그 영향 아래 있는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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