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섬뜩하게도 인간에게 있어서 폭력은 자신이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싸움 구경'이란 말도 있고 '강 건너 불 구경'이란 속담도 있듯이, 내가 아닌 타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자신에게 그 영향이 미치지 않는 한 꽤 짜릿한 재미를 안겨준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영화에서도 현실에선 용인되지 않을 온갖 폭력을 늘어놓고, 관객들 역시 현실에선 기겁을 할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어딘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영화 속 상황은 현실과 철저히 구분지어진다는 전제 하에 만끽되는 이러한 오락은 그러나, 정색하고 그 구분을 무너뜨리는 순간 쉽게 적응하기 힘든 불쾌함으로 바뀌어 돌아온다.
미하엘 하네케는 이러한 폭력의 본성을 끊임없이 탐구해온 감독이다. 그는 <피아니스트>, <히든>, 최근 선보인 <하얀 리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잠재되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통해 인간이 처참히 무너지는 모습에 집중했다. 그가 그리는 폭력은 아름답지도 않고, 멋있지도 않고, 어떤 이유로 인해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본연의 잔혹함과 비정함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결정적 작품인 <퍼니 게임>은 그러한 폭력의 거북스런 면모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이 이 영화더러 재미없고 불쾌하고 역겹다는 이야기를 하겠지만, 감독의 의도를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는 그래야 맞는 영화다. 재미없고, 불쾌하고, 역겨워야 마땅한 영화다.
평범한 일가족 - 앤(나오미 왓츠), 조지(팀 로스), 아들 조지(데본 기어하트) - 이 여름을 맞아 한적한 시골 별장으로 휴가를 온다. 반가운 이웃들을 만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어딘가 편치만은 않아 보인다. 해질녘이 되자 이들 가족의 별장에 한 피터(브래디 코벳)라는 청년이 찾아온다. 이웃집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피터는 앤에게 달걀을 빌려달라고 한다. 앤은 선뜻 빌려주지만 피터는 기껏 빌려준 달걀을 깨뜨리고, 나아가 앤의 휴대전화를 물에 빠뜨리는 등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계속 한다. 앤은 그나마 친절하게 그만 나가달라고 하지만, 피터의 일행인 폴(마이클 피트)이 가세하면서 언성이 높아져 간다. 알 수 없는 논리로 가족들을 계속 곤란하게 만드는 청년들을 내보내기 위해 조지는 격한 태도를 보이고, 폴은 난데없이 골프채로 조지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만다. 기어이 드러나고 만 청년들의 본색. 그들은 가족들을 향해 실실 웃으면서 재미있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다음날 오전 9시가 되기 전에 가족들을 모두 죽이는 게임이다.
이 영화는 미하엘 하네케 감독 자신이 10년 전에 만든 영화를 미국판으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감독은 원작이 언어의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영어판으로 만들었다고 스스로 밝혔기 때문에, 원작과 다른 부분은 배우와 언어 정도 밖에 없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Funny Games U.S'.인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카메라 구도나 세부적 소품, 심지어 등장인물들이 입는 옷까지 원작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원작과 실질적으로 다른 부분이 거의 없는 영화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여기서 영화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원작과 리메이크 모두에 해당될 수 있음을 말씀드린다.
두 청년이 가족을 두고 살인게임을 벌이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들의 표정이 한없이 밝은 것을 보면, 그들은 이 짓을 하는 것이 매우 재미있어 보인다. 이런 기가 차는 설정은 관객들의 심기도 불편하게 하겠지만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합격점을 주기에 충분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아내의 모습에서 순식간에 닥친 죽음의 위협 앞에 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떠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나오미 왓츠의 연기는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자상하지만 그게 다소 지나친 나머지 나약하게 굴복하고 마는 남자를 연기하는 팀 로스는 예의 카리스마 대신 불안감만으로 뒤덮은 연기를 선보인다. 두 청년 중 주동자에 속하는 폴 역의 마이클 피트는 그 꽃미모로 어쩜 저런 인간을 연기할까 싶을 정도로 소름돋는 싸이코패스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구현해낸다. 일단 배우들의 연기가 극 중 역할과 확실히 밀착되어 있으니, 관객들이 이 게임에 빨려들어갈 준비는 얼마든지 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의 주요한 무기는 가만히 있는 관객을 틈틈이 건드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객은 영화를 볼 때 영화 속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외부의 관찰자라는 자리를 보장받게 된다. 영화 속에서 때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을 접할 때 현실에서와 달리 재미있든 공포스럽든 어떤 식의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저들이 나를 알아차릴 리 없고, 저 일이 나에게 당장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싸울 땐 이판사판이지만 남이 싸우는 걸 볼 때는 재미있다고 팔짱끼고 보듯이 말이다. 그러나 <퍼니 게임>은 이렇게 관객과 영화 사이에 쌓아 올려진 일종의 벽을 과감하게 무너뜨린다. 영화 속 인물들이 카메라를 주시하는 것도 모자라 관객들에게 말을 걸기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서 관객들은 주인공과 하나가 됐다는 데서 오는 짜릿한 현실감 대신 불쾌함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말을 거는 대상이, 우리가 도덕적으로 감정을 이입하는 선량한 가족이 아니라, 악행을 저지르는 청년이기 때문이다. 폴은 우리에게 눈짓을 하거나 동의를 얻어내려는 투의 질문을 함으로써 관객들을 은근슬쩍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은 도덕적으로는 가족들 편에 서지만 사실 이 끔찍한 사건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몹쓸 짓인게 사실이다. 그런데 악한 청년이 이런 식으로 관객에게 접근을 하니까, 관객은 애써 외면하던 비도덕적인 관음증의 심리를 들켜버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혐오감이나 일종의 수치심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관객의 격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은 역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다분히 의도한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많은 매체를 통해 접하는 폭력이라는 것이 어떤 실체를 갖고 있는지 보여주려 한다. 미디어를 통해 폭력을 오락적 수단으로 여기게 되면서 폭력에 대해 둔감해지게 된 시각을 다시 바짝 일깨운다. 그것은 관객을 제삼자적 관찰자 입장이 아니라 극중 인물의 입장, 그것도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영화는 시작부터 두 청년의 무리한 부탁 등을 제시하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만 이를 지극히 평화로운 분위기로 이끌어간다. 공포감을 극대화하거나 폭발적 에너지를 유도할 배경음악은 아예 없다. 건조하고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만행을 관객은 가해자의 입장에 서서 관찰해야 한다. 살인이 이뤄질 때 카메라가 비추는 것도 희생자가 살해당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으로 인해 충격받고 고통받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 또는 살인을 하는 순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청년들의 표정이다.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오래 부각되거나 강조되지 않고, 순식간에 지나가거나 아예 생략되기도 한다. 청년들은 이 모든 짓들을 게임이라고 말하며 애들 장난인양 행동하지만, 관객의 표정은 갈수록 일그러진다. 이러한 관객들을 향해 영화는 묻는다. 당신들도 지금까지 폭력을 게임처럼 즐겨왔지 않냐고. 다만 직접적이 아닌 어느 한 매체를 통해서일 뿐이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비인간적 행위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게임'이다. 오프닝에서부터 가족은 차 안에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누가 만든 어떤 곡인지 맞추는 게임을 하는데, 그 순간 우아한 클래식 음악의 흐름을 깨고 조금만 듣고 있어도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과격한 헤비메탈 음악이 흘러나오며 크레딧을 띄운다. 평화를 깨뜨리는 이 음악의 등장처럼 후에 단란한 가족의 행복을 깨뜨리는 잔혹한 게임이 시작되는데, 관객은 곧 그 게임에 자신이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고 경악한다. 컴퓨터 게임 속에서 온갖 무기를 활용해 폭력을 휘두르고, TV나 영화를 통해 펼쳐지는 폭력을 멋있다는 이유로 보고 즐겼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컴퓨터 게임과 같은 가상현실이나 전혀 관계없는 관찰자 입장이라는 일종의 보호막을 완전히 걷어내고, 마치 실제 상황과 유사한 비정한 만행이 이뤄지고 있는 현장에 굳이 손을 잡아 끌고 데려다 놓는다. 청년들은 정말 가상현실의 게임을 즐기듯 실제 사람들을 죽이고, 실수로 자기 편이 죽었다 싶으면 저장해뒀던 지난 게임을 다시 불러오듯 리모콘을 활용해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 결국 자신들의 의지대로 일을 이루고 만다. 폭력을 향한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변호할 수 있었던 조건들을 모두 없애버린 냉혹한 현장에서의 폭력 경험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은커녕 못할 경험을 한 듯한 불쾌함을 안겨준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이렇게 관객을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접하게 됐을 때 진정 불편하고 역겨워야 마땅한 것, 그것이 바로 폭력임을 이야기한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폭력의 양상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폭력의 본질을 들춘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극도의 불쾌함과 찝찝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받았다는 의미가 된다. 오히려 이 영화가 재미있고 스릴 있었다고 느낀다면 심리상태를 의심해봐야 할 만큼 <퍼니 게임>은 폭력의 가장 결정적인 지점을 건드린다. 원작이 만들어진 지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 사이에도 이만큼 폭력의 주체에게 관객을 강제로 끌어들이고 그 폭력의 잔상을 적나라하게 인식시키는 영화는 좀처럼 없었기에 영화는 지금 봐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미국에서 이 영화가 공개됐을 당시 평론가들이 앞다투어 '최악의 영화'라고 했다는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떤 방향으로든 폭력을 즐기고 있었던 자신들의 심리를 미하엘 하네케 감독이 너무나 천연덕스러우면서도 너무나 정확하게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하지도, 편하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리에게 피와 살이 되는 교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꽁꽁 숨겨놓았던 부끄러운 욕망을 똑똑히 들추어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