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각본의 설경구, 문성근의 특별출연.
사실 스케일 자체가 작은 영화는 아니지만 독립영화의 성격을 가진 <여행자>는
자극적이지 않은 제목과 포스터로 주목받지 못할까봐 다소 안타까움이 있는 작품이다.
오다가다 한번쯤 마주친 것 같은 인상의 어린 주인공(포스터 속의 청순한 이미지의 소녀가 바로 그녀다)
김새론은 얼마 전부터 뮤지컬 등의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는 아역 배우라고 한다.
실제 김새론의 눈빛에서는 '인생의 깊이'가 묻어날만큼 내공이 대단해보였다.
김새론과 함께 비중있게 출연한 박도연과 고아라는
진즉에 스크린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이라 예상되었던 유망주인지라
이 작품 속의 아역들은 이미 성인 연기자의 포스와 실력을 겸비하고 있다.
최근 억지로 눈물을 짜내려는 영화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기 때문인지,
강요된 감동이나 슬픔이 아닌 잔잔한 가슴저림이
이 영화를 따뜻하게 만날 수 있는 관전포인트가 될 것이다.
인생의 첫번째 여행,
그리고 그 여행의 계기는 첫번째 이별-
박도연이 칠판에 비뚜름하게 쓴 글씨이기도 한 "프화아더(FATHER)"는
아홉살 진희가 여행자로 서게 하는 공신이다.
이렇게 주인공 진희와 보육원의 아이들은 "고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모로부터 떨어져
일찌기 홀로서기를 알아버리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바로 <여행자>의 전부다.
위기철의 '아홉 살 인생'이란 책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며
"아홉 살이면 인생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나이" 란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아
'그저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지, 라고 생각했는데...
어른들이 '사춘기'라고 규정해버린 특정한 시기가 아니어도
사람은 살면서 어린 시절에도 충분히 성숙해지는 계기를
여러 번 맞닥들이는 것이 아닐까 공감하게 되었다.
"왜 약속 안 지켜요? 약속 했잖아요."
아홉 살 소녀에게 약속은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버팀목이다.
하지만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아빠도,
주사바늘 찌를 때 꼭 이야기 해주겠다던 간호사 언니도,
손가락까지 걸고 같이 미국에 가자던 숙희 언니도, 진희와 한 약속을 너무 쉽게 지키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들로부터 진희는 세상에 진정 홀로 오롯이 서야 함을 깨닫고
쓸쓸하지만 새로울 인생의 첫 발을 내딛는다.
죽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더라도, 죽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면서,
(그것이 설령 하늘이 주신 소중하고 귀중한 생명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가르침 때문이 아니더라도)
십자가까지 세워 둔 죽은 새의 무덤도, 화투점도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란 것을 알면서,
"거짓말이야!" 집어던지고, 다 집어뜯고 신경질 부리고 싶은 일이 여기저기서 툭! 튀어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튀어나오는 일들이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도 알면서........
아홉 살 소녀의 첫 여행, 낯선 세상으로의 홀로서기-
너무 일찍일 뿐이지, 진희의 삶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이기도 하다.
왜 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쉽게 약속을 하고, 쉽게 약속을 어기고,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는 것일까?
올해도 6년째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조차도 "그러자"고 해놓고 지키지 못했던,
아니, 지키지 않았던 약속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아 이제와 새삼 미안해진다.
개인적으로 <여행자>라는 제목이 내포한 제한적 이미지가 영화의 메세지를 축소시키는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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