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이 사라진 자리에 눈물 한 가득... ★★★☆
영화 속 의사의 말대로 이건 공식적으로는 ‘제안할 수도, 성립될 수도 없는 일’임에 분명하다. 백혈병에 걸린 딸의 치료를 위해 골수가 맞는 맞춤 아기를 만드는 일(!) 말이다. 특정 목적을 위해 생산(?)된 안나(아비게일 브레슬린)는 5살 때부터 아픈 언니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를 위해 혈액, 골수, 줄기세포 등을 제공해 왔으며, 언니의 병세가 악화되자 신장 제공을 앞두고 있다. 이제 11살이 된 안나는 유명 변호사인 캠벨(알렉 볼드윈)을 찾아가 ‘몸의 권리’를 되찾고 ‘의료 해방’을 위해 부모를 상대로 한 소송을 의뢰한다. 재판을 위해 다시 변호사로 돌아간 엄마 사라(카메론 디아즈)를 비롯한 가족들은 한 아이의 생명과 한 아이의 미래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며, 가족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그 이면에 감춰졌던 아픈 진실이 드러난다.
원작 소설을 읽진 않았지만(신청해 놓았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오늘쯤 오려나? 오면 읽고 영화를 보려 했는데, 같은 사무실의 동료가 보여준다기에 열심히 따라가 봤다... ^^) 소설이나 영화의 기본 설정 자체부터가 상당히 논쟁적이다. 우선 맞춤 아기를 생산(?)한다는 것부터 다양한 논란이 예상된다. 종교, 윤리, 철학 등의 분야와 결부된 갖가지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거기에 과학의 발전 수준이랄지, 맞춤 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도태된 생명에 대한 문제까지 확대될 여지는 충분하다.
어쨌거나 그러한 논란을 거쳐 아기가 태어난다고 논쟁이 그칠 거 같지는 않다. 왜냐면 아이는 자신의 신체 일부를 누군가에게 계속적으로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미성년자인 아이라면 영화에서처럼 ‘스스로의 몸을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와 ‘미성년자의 법적 보호자인 부모의 권리’ 사이의 충돌을 기본으로 해서 역시 다양한 논란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영화에선 대부분의 의사들이 장기를 기증해야 된다는 입장을 지지하지만, 현실에서라면 쉽게 얘기하기도 힘들 것이다. 아무리 미성년자라도, 그리고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장기를 기증함으로서 환자의 회복을 100% 보증할 수 없다면, 기증자의 남은 삶을 고려해볼 때, 너무 잔인하고 무책임한 결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기증 쪽에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다. 비록 100% 환자가 살아난다는 약속이 없어도, 가족 중에 유일하게 나만이 기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의 기증 거부로 사랑하는 누군가가 사망에 이른다면(기증과 사망 사이에 큰 인과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그 죄책감이란 무게를 견디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다. 더군다나 점점 병들어 가는 가족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자, 그렇다면 기본 설정이 논쟁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 되면 영화도 논쟁적이 되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무수한 사례를 알고 있다. 특히 감독이 닉 카사베츠라면 더욱 그러하다. <더 홀> <존 큐> <노트북> 등 그가 만든 영화는 대체로 예민한 논쟁거리를 담고는 있되, 그것을 전면으로 부각시키지 않고 주로는 멜로 안으로 녹여 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아마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존 큐>와 <노트북>의 중간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 것 같다.
당연하게도 <존 큐>와 <노트북>을 생각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건 눈물이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 역시 평소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면 미리 휴지를 준비하는 등 각오하고 가야한다. 그만큼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줄을 잇는다. 14년 동안의 투병생활로 가족의 많은 것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케이트의 마음씀씀이도,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딸의 건강에 집착하는 사라의 주름도, 사랑하는 언니를 바라보는 안나의 맑은 눈망울도, 바다를 보고 싶다는 딸의 소원을 위해 아내와 거친 몸싸움도 마다않는 아빠 브라이언(제이슨 패트릭)과 동생의 투병을 묵묵히 지켜보는 오빠 제시(에반 엘링슨)의 몸짓까지도 연신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그러면서 영화는 병자가 있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시선을 하나하나 애잔하게 담아낸다. 소설의 구성도 그렇게 되어 있다고는 하는데, 가족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입장을 스스로의 목소리에 실어 내보내는 장면은 비록 밝고 유쾌한 장면에서도 슬픔을 자아낸다. 이 과정에서 닉 카사베츠 감독은 슬픔을 더욱 슬퍼보이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 밝고 유쾌한 장면을 판타지에 실어 (아마도) 실제보다 더욱 행복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과장되게 웃는 인물들, 그리고 과장되게 날아다니는 비누풍선들. 거기에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일부 장면은 좀 생뚱맞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노래가 좋다는 것과는 별개로. 아무튼 영화를 보고 나서 찾아보았더니 아직 OST 발매 전이다)
어쨌거나 초반의 논쟁적 분위기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품에서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 녹듯이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여기에 <씨 인사이드> <잠수종과 나비>의 주제인 존엄하게 죽을 권리라는 새로운 논쟁거리가 등장하지만, 이 논쟁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서둘러 봉합해버린다. 논쟁을 대신하는 눈물이 누구에게는 불만이 될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최고의 선택이 될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 누구에게라도 정화의 순간을 제공하는 눈물일 것이다.
※ 자매 역을 맡은 아비게일 브레슬린과 소피아 바실리바의 연기는 정말 눈여겨 볼만하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저질 댄스로 일약 주목의 대상이 된 아비게일 브레슬린은 '정말 잘 자랐구나' 싶게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소피아 바실리바의 병자 연기 역시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호들갑 여왕' 카메론 디아즈(아마 아카데미에 호들갑 연기상이 있다면 수상은 무조건 카메론 디아즈의 것이다)의 변신도 꽤나 놀랍다. 사실 이 역에 카메론 디아즈를 캐스팅했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 아닐까 하는데, 충분히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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