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감동(감성적 움직임)은 흔히 제공자가 그것에 대해 초연할 수록 더 진실되게 다가온다. 희노애락 중 어느 부분이라도 제공자가 그 목적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난 당신을 기필코 감동시키고 말거야' 하면서 득달같이 달려들면 오히려 수용자는 그것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반대로 제공자가 그저 무심하게 (아니면 무심한 척하면서) 툭 던진 감흥에 수용자는 의외로 매력을 느끼게 되기도 하다. 곧장 그 감흥에 휩쓸리지는 않을지라도, 그 뒷맛은 진하게 남아 꽤 오랫동안 머리와 가슴 속을 맴도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어떤 상황이 포장되고 포장되어 다가온 결과물에만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 포장 이전에 그 상황 자체가 처음부터 담고 있었던 현실의 무게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정말 그 영화가 우리 주변의 현실을 절실히 담고 있다면, 굳이 배우의 과장된 연기와 눈물을 짜내려는 음악으로 감동을 유발하려 하지 않아도, 그저 CCTV마냥 건조하고 덤덤하게 찍어도 우리는 기꺼이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다. 보는 즉시 눈물을 일으키지 않아도, 영화가 끝난 뒤라도 서서히 그 감흥의 파문은 짙게 퍼져나가게 된다. 영화 <나무 없는 산>이 그런 영화다. 흔히 어떤 유머를 던졌는데 상대방이 웃지 않으면 우스갯소리로 '지금 안웃겨도 네가 나중에 잠자리에 들 때 쯤 웃음이 터질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영화가 그런 셈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은 아니더라도 영화관을 나서서 집으로 한참 향하고 있을 때 쯤, 눈물은 당신의 뺨에서든 당신의 가슴 속에서든 어느덧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취를 감춘지 오래인 집에서 자매인 진이(김희연)와 빈이(김성희)는 엄마(이수아)와 셋이서 넉넉하진 않지만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엄마는 일하러 다니는 관계로 매일 진이가 학교를 다녀오면 이웃집에 맡겨 놓은 빈이를 데려 오는 식으로 일과를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 여느 때처럼 학교를 다녀오던 진이는 엄마가 짐을 싸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내 엄마 따라 지방에 있는 고모네 집에 다다른 진이와 빈이. 엄마는 자매에게 아빠를 찾아오겠다며 잠시동안의 이별을 통보한다. 엄마는 돼지저금통을 자매에게 주면서 여기에 동전이 가득 차면 엄마가 돌아오겠노라 하고 버스를 타고 자매를 떠난다. 자매를 아예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지중지하는 것도 아닌 고모 밑에서 익숙치 않은 생활을 하는 자매는 동전을 모으려고 메뚜기를 구워서 상급생 오빠들에게 팔기도 하고, 10원짜리 동전으로 바꿔오기도 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해본다. 그렇게 어느덧 동전은 저금통을 가득 채우지만, 돌아온다던 엄마는 돌아올 생각을 안한다. 그렇게 엄마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자매는 고모네 집에서 다시 시골 할머니 집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 영화만큼 주인공에게만 온전히 집중하고 주변 묘사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영화 전체 분량의 90% 이상은 두 주인공인 진이와 빈이 자매의 클로즈업이 차지할 만큼 영화는 자매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들이 말하는 것, 그들이 듣는 것, 그들이 보는 것, 그들이 하는 일이 중심이다. 웬만해서 주변 환경을 보여주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아서, 자매가 이전에 살던 아파트나 고모네 집, 할머니 집, 동네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가도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영화는 자매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중심을 갖다 놓고 영화를 진행시키기에 이들의 연기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지 못하면 영화의 의도는 빛이 바래기 십상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들의 연기는 매우 훌륭하다. 진이와 빈이 자매 역을 맡은 김희연, 김성희 양은 비전문 배우이니만큼 한결 덜 다듬어지고 덜 꾸며진 연기로 영화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하는 힘을 지닌다. 여느 드라마 속 아역들처럼 '엄마~는 언제 와아~?' 하는 정형화된 톤과 표정이 아닌, 낯선 환경에서의 불안감과 희망, 기쁨과 슬픔이 모두 들여다 보이는 자유로운 연기를 보여준다. 아이들은 모르지만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아이들의 이렇게 마냥 천진한 모습은 오히려 마음을 더 짠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아이들의 연기 뿐 아니라 엄마 역의 이수아, 고모 역의 김미향(<밀양>에서 집사 아줌마로 친숙하다), 시골 할머니 역의 박분탁 할머니까지 성인 연기자들의 연기도 워낙 과장되거나 극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워서 이 작품이 극영화가 아닌 그저 아이들의 숱한 일상에 잠시 카메라를 들이댄 다큐멘터리인 것 같은 사실적 분위기를 충실히 안겨준다.
앞서 얘기했듯, 이 영화가 주목하는 건 오직 '아이들의 우주'다. 아이들을 둘러싼 주변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엄마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아빠를 찾으러 나섰는지, 왜 그 과정이 쉽지 않은건지, 고모는 무슨 일이 있길래 그렇게 술을 마시는지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분명 어른들의 삶도 팍팍한 게 느껴지는데, 영화는 그것을 친절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저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상황이 좀 안좋아보이는구나' 하는 정도로만 느끼게 할 뿐이다. 대신 영화는 아이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런 주변의 일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주의깊은 관찰을 통해 보여준다. 여기서 관찰이란, 물론 아이들의 표정과 시선, 말과 행동에 대한 관찰이다. 팍팍한 세상의 삶은 어른들과는 다른 형태로 아이들에게 다가와 아이들의 삶도 팍팍하게 만든다.
아이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아빠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간 엄마의 고된 여정도 아니고,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고모의 고단한 삶도 아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던 엄마가 사라진 채, 낯선 환경에서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들에겐 가장 힘든 것이다. 흔히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요즘 힘들다고 얘기하면, '니네들 때는 그런 게 힘든 거지만 니들이 어른 돼봐라.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한다. 하지만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먼 아이들이 어른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된 삶을 알 턱이 있을까. 아무리 어른들이 보기에 그 크기가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지금까지의 삶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힘든 건 지금 겪고 있는 그 일이다. 아이들이 메뚜기를 구워서 오빠들한테 파는 것도, 시장에 가서 찐빵을 사먹는 것도 '먹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라기보다는 동전을 빨리 모아 엄마를 만나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하다. (이런 점은 어떻게 보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아이들이 세상의 고된 면을 깨달은 건 아닌 셈이기 때문에) <나무 없는 산> 속 진이와 빈이 자매에게는 엄마라는 기댈 곳이 없는 낯선 환경에서 기약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지금의 상황이 가장 힘든 일인 것이다. 바깥 현실에서 다른 가족들에게 어떤 안좋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아도, 그건 아직 아이들의 입장에서 헤아리기엔 버거운 상황이다. 영화는 이러한 아이들의 고민을, 철저히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그림으로써 관객들이 아이들의 삶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눈높이에서 둘러보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영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이 끝내는 아이들의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겪는 순탄치 않은 삶이 결국은 나이를 막론하고 우리들에게도 언제든지 닥치게 마련인 삶의 한 순간으로 다가온다. 다만 그런 힘든 순간이 이제는 어느 정도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된 상화에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아직 한참 뒷받침이 필요할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 다가온다는 점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을 정말 힘들게 하는 극단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을 맡아 키우게 된 고모가 아이들을 못살게 군다든지, 전화를 빌리려 말을 건 아저씨가 해코지를 하려 한다든지 하는 상황은 다행히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다고 어른들이 이 아이들을 주의깊게 지켜보지도 않는다. 고모는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해줘야 할 만큼만 해줄 뿐, 더 잘해주려 하진 않는다. 찾아가면 간식을 많이 주는 옆집 아줌마는 아이들에게 잘해주긴 하지만 아이들의 고민을 이해하고 해결하려 하기엔 역부족인 방관자일 뿐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은 특별히 고통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은 곳이다. 무관심의 한복판에서 아이들은 그저 조심스럽게 길을 헤매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치 않은 방황은 이 아이들만의 특수한 상황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는 물론이고, 어른이 된 후에는 더더욱 우리는 아무런 해답도 제시되지 않은 허허벌판에서 방황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이 무수히 존재할 것이다. 차라리 누군가가 '이렇게는 하지 말라'는 식으로 타산지석의 예를 보여준다면 그 반대로만 가면 되니까 괜찮겠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관심사를 갖고 살아가는 세상은 그렇게까지 우리들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웬만해선 우리를 작정하고 궁지로 몰아넣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적극적으로 북돋아주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선택하고 나아가야 하는 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나무 없는 산>은 우리에게도 무수히 다가올 삶의 씁쓸한 순간을 아이들의 낯선 며칠간에 담아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그래도 이런 시련을 겪기에는 아직 너무나 어린 아이들이 제 나름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작은 아이들에게까지도 동정은 없는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낸다. 누구나 언젠가는 겪게 마련인 삶의 과정이지만, 그래도 아직 이 나이 때 이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이른데, 하면서 말이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 흙더미 위에서 엄마를 기다리면서 가지만 남은 나무를 흙더미 위에 심는다. 흙더미는 그리 안정적이지 못하다. 자갈과 돌이 듬성듬성 틈을 보이는 흙더미는 영양분은 쉽게 찾아볼 수 없이 건조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흙더미에 끊임없이 나무를 심으려 하고, 나무는 결국 심어지지만 누군가의 무심한 손길에 언제 스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이 겪고 있는 삶도 그 나무와 같을 것이다. 누구 하나 아이들을 꼭 붙잡아 줄 사람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서 있어야 하고 스스로 햇볕을 찾아 양분을 얻어야 하는 나무처럼 아이들은 결국 스스로 깨달아 가는 것이다.
아이들이 점점 현실에 적응해 가며 예전의 천진함을 되찾는 모습은 한편으론 뿌듯한 희망을 안겨줄 법도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이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가르침을 주고 본보기가 될 어른이 주변에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팍팍한 현실을 직접 겪어본 뒤에 스스로 얻은 깨달음이기에 씁쓸한 여운으로 남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은 '산으로 올라가고 싶어. 산 뒤로 내려오고 싶어. 강에서 헤엄치고 햇빛 쬐고 모두에게 잘하고 싶어.'라고 노래를 부르며 밝은 표정으로 산길을 걷는다. 다시 삶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았기에 나올 수 있는 표정이겠지만, 그 한 켠에 '결국 삶이란, 특별한 이정표 없이 내가 알아서 나아가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당연하지만 차가운 깨달음이 서려 있을 것이란 생각에 마냥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나무 없는 산>은 이처럼 별다른 포장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며칠간 겪는 삶 그대로의 모습에서 결국 우리 모두가 겪는 삶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하는 영화다. 아이들의 표정이 곧 우리들의 표정이 되고, 아이들의 시선에 곧 우리도 향한다. 이 아이들에게도 동정은 쉽게 주지 않는 세상인데, 우리에겐 오죽할까. 엔딩 크레딧 때까지 음악 한 번 등장하지 않는 무덤덤한 흐름 속에서, 영화는 이러한 씁쓸하고 아련한 슬픔을 담백하게 담아낸다. 빈이의 공주 드레스에 때가 타듯이, 세상을 만나가며 성장할 아이들에게도 먼지가 묻을텐데. 아이들의 힘든 마음도 옷처럼 빨면 다시 깨끗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영화는 세상을 만나면서 아이들은 그만큼 자라겠지만 어떻게 보면 상처를 치유해 가는 기쁜 이야기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 속에서 세상을 알아가기엔 아직 너무 어린 아이들이 보이는 아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