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만해도 미술 시험 때문이긴 했지만 미술책의 그림이라도 억지로 봤었는데, 나이가 들어 그나마 그 반강제성마저 사라지고 나니 점점 미술과는 담을 쌓고 살게 되는군요. 그러던 중 올해 초 전 어떤 미술 전시회에 갔다가 한국 수묵화를 봤습니다. 세로로 긴 그림이었는데 산이며 나무며 풀이며 먹의 강약과 선의 굵고 얇음에 따라 펼치지는 그 오묘한 풍경이 참 오랫동안 저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 한가한 구경꾼 입장이고 장승업에겐 저처럼 편하게 그림 구경(--;;;)할 여유 따윈 애초에 없었겠죠.
그림을 그 자체만으로 이해 못하고 먹물 티나 내는 양반들에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따나는 이가 있습니다. 제 아무리 반상의 개념이 많이 무너진 조선 말엽이지만 오만한 자세가 아닐 수 없죠. 그의 이름은 장승업. 한다하는 집안이라면 그의 그림 한 점쯤은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날리는 화가이지만 그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군요. 그런 그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명의 은인이자 후원자이며 때론 날카로운 비평가이고 어느 땐 친구처럼 형처럼 아버지처럼 그의 곁을 지켜봐준 선비 김병문. 오원이라는 호도 그가 지어준 거죠. 그리고... 매향. 술자리에서 만난 그녀의 생황소리는 첫사랑에 아팠던 그의 가슴을 달래주었습니다. 매향은 아스라한 묵의 향기처럼 편안하게 또는 미치도록 그립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긴 인연은 못 됐지만...
장승업은 계속 중얼거립니다.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 반복된 중얼거림은 그의 내면에 작은 바람으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어갑니다. 내부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여 계속 커져가는 회오리에 인연이라는 미약한 존재성은 다 튕겨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죠. 자신의 힘으로 창조해낸 그림조차도 영원하지 않고 지나고 보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지는데 전혀 모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가지기엔 너무 버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무언가를 쫓아 계속 떠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새로운 자신만의 화법으로 영원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치는 거죠. 아마 그에게 김병문이라는 지인마저 없었다면 그는 그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 완전히 폭발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역시!!’였습니다. 누군가 만들어야 한다면, 그걸 만들 수 있다면 바로 임권택-정일성-이태원이라는 삼총사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죠. 하나하나 공들은 장면은 마치 산수화로 된 12폭 병풍을 보는 듯한 웅장함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아직 저런 곳이 있나보네?!”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거든요. 무엇보다 장승업에 대해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만큼 끌어냈다는 점은 이 영화에 들인 공이 얼마나 큰지 면면히 느껴졌습니다. 최민식은 그 그림에 찍혀진 마지막 낙관 같은 존재감이었고요. 그러나... 아쉽습니다. 제가 느낀 [취화선]에는 그림으로 치면 화룡점정이 없더군요. 훌륭하되 가슴에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그 무엇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같이 본 사람들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림 같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것을 바라던 감독의 의도는 알겠지만 이건 장승업의... 장승업에 대한 영화가 아니었던가요?
그래도 마치 술에 취한 듯... 그래서 흰 종이와 검은 먹의 산수화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영화 속에서 몽롱하게 헤매다보니 어느새 영화가 끝나 있었습니다. 돌아 나오는데 왠지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안 들더군요. 옛 이야기에 나오던 선계에 갔다가 노인이 되어 돌아온 어느 나무꾼처럼 말이죠. 문득... 내가 여러 가지로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로움과 변화가 큰 화두였던 조선말이라는 거대한 혼란 속에서 장승업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그 무엇을 찾았을까요? 그에게 있어서 새로움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그가 남긴 그림뿐이겠죠.
추신: 이 글 썼을 땐 칸 영화제 끝나기 전이었는데.. 드디어 상을 타셨군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i . i -_-; 2%만 채워졌다면 작품상도...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