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그는 존 맥켄지의『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를 번역했으며 영남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는 누구나 쉽게 따르기 어려운 삶을 이끌어가는 인물로 남들이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시대에 타협하지 않는 외골수로서 스스로 아나키스트를 자처한다. 자동차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휴대전화도 없으며, 인터넷이 안 되는 집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 땅의 면적을 전체 인구 수로 나누어 떨어지는 1인당 땅의 면적만을 소유한 채 거기서 아내와 손수 농사지으며 자연주의자로 살아간다. 이 정도면 아마도 대한민국 지식인 중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상과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며 사는 실천적 의지에 깊이 감명 받은 나는 그의 칼럼의 열렬한 독자가 되었다. 내가 며칠 전에 읽은 글의 제목은 ‘똥파리’였다. 욕설과 폭력으로 시작해 그걸로 끝난다고 소문난 양익준 감독의 밑바닥 영화 ‘똥파리’를 관람한 그가, 영화가 이 시대와 오버랩 되어 있음을 독자에게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던진다.
“내가 본 그 어떤 폭력영화보다 충격이었다. 그 폭력과 욕설의 대상에 행인이나 경찰은 물론 형제에 부모까지 포함된 패륜적인 점도 충격이었으나......그러나 사실 그 충격이란 것도 잠깐이었다는 점이 더 큰 충격이다. 이는 내가 두 시간 내내 전혀 웃지 못한 것이, 사실은 영화보다 더 엄청난 폭력이 밝은 대낮에도 벌어지고 있는데도, 기껏 컴컴한 극장 안에서 생전 처음 본 듯 충격을 받은 체 가장하는 도덕적 위선 탓임을 곧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얼마나 깊은 위선의 늪에 잠겨 있는가. 입과 손발이 맞지 않는 행진을 거듭하면서도 도덕군자인 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은 가방끈이 길수록, 유명세를 타는 자들일수록 더 심해서 그들의 위선을 눈치 챈 자들로 하여금 구토하게 만든다.
박 교수는 다시 말을 잇는다.
“우리 사회는 이미 너무나도 폭력적이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적어도 자신이나 내 가족 내 직장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타인의 폭력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그걸 구경하며 즐긴다는 점에서 더욱 더 폭력적이다.”
우리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건 아닐까? 다분히 관음증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기를 타인과 차별화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호하게 말을 매듭짓는다.
“권력과 지배 자체를 거부하고 그 더러운 것에 끓는 똥파리가 아니고자 노력해야 한다. 특히 정상배들의 하수인들은 최소한 똥파리가 아니도록 반성해야 한다......그런 똥파리가 많지 않은가? 심지어 시인이니 소설가니 예술가니 하는 향기로운 미명의 똥파리도 많지 않은가?”
우리는 최근에도 그런 일을 목도했다. 아니 매일 목도한다. 글과 양심을 팔아가며 권력의 홍위병 노릇하는 지식장사꾼들, 몽둥이 움켜잡은 손으로 정의와 평화 부르짖는 정치사기꾼들, 유명 문인들이 보여주는 파렴치한 야욕, 선을 가장한 페니스 파시스트들의 농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악의 축대를 쌓는 종교인들. 오오, 나는 매일 구토한다.
사람들이여 부디 주의 경계할지어다. 아름다운 것들, 향기로운 것들, 높이 있는 것들, 숭고해 보이는 것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부드러운 말들을. 그 어떤 것도 과신하지 말고, 근사한 포장지를 벗기고 그 속을 채우고 있는 모순들을 똑똑히 볼지어다. 그것이 나도 너도 똥파리가 되지 않는 첩경이리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