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과 연민, 애정... 그리고 뒤늦은 슬픔... ★★★★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08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을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본다는 것은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른다. 많지 않은 대사, 대체로 무표정한 얼굴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끈질기게 인물을 따라 다니는 카메라, 거기에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장면들을 과감히 없애버린 과격함(!)
정리하자면 이렇다. 알바니아에서 온 로나(아르타 도브로시)는 애인 소콜이 있음에도 벨기에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클로디(제레미 레니에)와 위장 결혼을 해서 살고 있다. 그녀의 꿈은 애인과 함께 조그만 카페를 하며 사는 것이다. 드디어 벨기에 국적을 취득한 그녀. 자신처럼 벨기에 국적을 취득하려는 러시아 남자와 위장 결혼을 해주면 꿈을 이룰 수 있다. 알바니아 범죄 조직은 로나를 과부로 만들기 위해 클로디를 약물 과용으로 죽이려 하고, 클로디는 마약을 끊기 위해 로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냉혹하게 뿌리치려 해도 클로디의 거듭된 요청에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생긴 로나의 고민은 깊어가고...
지난 10여 년 동안 유럽 사회의 그늘이 만든 어둠을 응시해 온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은 여전히 그들의 시선이 그늘에 머물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클로디는 로나에게 관심과 애정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로나는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세상에, 아무리 위장 결혼이라고 해도 몇 년을 살았을 터인데,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다. 그런 로나에게 클로디는 계속 기대려 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눈만 딱 감고 모른척하면 될 터인데, 조그마한 동정심과 연민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자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가슴은 허물어진다.
그런데 이 과정을 지켜보는 시선은 시종일관 무심함을 견지해 나간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로나의 침묵>은 대사가 많지 않다. 적다는 것보다는 많지 않다는 게 아마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꼭 필요한 대사 이외의 말은 심지어 소음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이건 어쩌면 이민자가 느끼는 외로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카메라는 끈질기게 인물을 따라 다니지만 극단적인 클로즈업이나 원경으로 잡아내지는 않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집착과 관조의 중간 지점에서 인물을 관찰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결정적 지점은 가장 중요한 장면을 들어냈다는 것에 있다. 사실 로나의 표정만으로는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기 힘들다. 그녀는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클로이를 위해 이것저것을 해준다. 마약에서 벗어나려는 클로이를 위해 의사에게 대신 전화를 해주고, 부축해 병원으로 같이 가 준다. 입원한 클로이를 위해 CD 플레이어와 음악 CD를 보내주고 그의 돈을 대신 관리해 준다. 그러나 클로이는 이혼을 원한다는 로나의 계획을 알게 된 순간, 다시 마약의 세계로 빠지려고 하고, 이를 막기 위해 로나는 기꺼이 클로이와 섹스를 한다. 동정심과 연민의 감정이 드디어 애정임이 확인된 순간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 직후 잠깐 행복해하는 클로이의 모습을 비춘 뒤 그의 죽음을 말한다.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말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클로이의 물건을 챙기는 로나, 클로이의 CD 플레이어를 손대는 알바니아인에게 소리를 치는 것으로 클로이에 대한 애정과 슬픔은 표현된다.
이 영화에서 클로이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은 건 대단한 과격함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감정을 주인공에게 이입시키고,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 가장 좋고 쉬운, 그리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지도 않을 그 장면을 드러내다니. 좀 의아했다. 대체 왜 이래야 했을까? 마치 죽음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영화는 그저 흘러간다. 클로이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믿는 로나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돌로 알바니아인을 내리치고, 숲 속으로 뛰어간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곳에서 로나는 안식을 되찾는다. 영화가 끝났음이 머릿속에서 인지되고 나서야 갑자기 슬픔은 뒤늦게 밀려온다. 이격되었던 나와 로나, 나와 영화는 그제서야 하나가 된 것이다. 클로이의 죽음을 화면에 담지 않았던 건 바로 뒤늦은 애도, 슬픔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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