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정의 혹은 가치를 위해 기자는 필요하다. 아니 기자적 소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이란 제한 속에서 올바른 사실을 전달하는 기자의 소명은 쉽게 무너질 위기에 봉착하곤 한다. 아마도 이런 구도 하에서 State of play란 영화가 제작된 듯싶다. 정직하기 위해 거쳐야 할 위험들과의 대결, 이것이 State of play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의역하면 ‘가면극’이란 위선의 무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정직이 서 있는 무대일 것만 같다.
기자 칼은 정직을 담고 있는 노련한 가판대 신문 기자이다. 가판대 기자란 점에서 시대적 후진성조차 느껴지지만 영화 내에선 신문의 가치를 지닌 기자로 나온다. 하지만 그의 주변엔 그의 자긍심을 깨뜨릴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음모들도 마찬가지고. 친구인 정치가 콜린스나 신문사 상사인 카메론 역시 자본주의를 가슴에 품은 언론사 윗분으로서 자본 축적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경영진의 의견을 충실히 따른다. 앞서의 추상적 존재들을 이렇게 사람이름 달고 있는 특정 직위의 인물들로 구체화시킨 다음 영화는 그들간의 복잡하고 이익에 치우친 모습들을 통해 현대의 언론이 겪고 있는 혼미한 정직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정직은 본연의 가치를 찾고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윤전기 돌아가는 광경과 신문 찍어내는 것들을 보면서 아직도 영화상에선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정직을 유지하기 위해 맞서야 할 것들은 과거보다 더욱 많아졌다. 정치집단, 이익집단들은 자신들의 힘을 이용, 올바른 기사를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악용하거나 사라지게 만들려고만 한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탐욕 역시 올바른 기사들에겐 적일 뿐이었다. 언론사가 정직한 기사를 옹호하기보단 단기적 이익을 위해 그런 기사들을 폐기시킬 용의를 공공연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심도 있고 분석적인 종이신문보단 즉흥성을 통한 고정독자층 모시기를 마다 않는 인터넷 신문의 범람은 자본주의적 폐해의 또 다른 면이기도 하다. 여기에 언론사의 판매고 우위의 정책은 또 한 번 심도 있고 체계적인 기사를 방해하고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내용들로만 채워진 내용들을 요구한다. 이런 환경에서 언론사 초기의 건강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며 이런 것들이 자극적인 소재로서 기능한다. 여기에 State of Play가 있다.
같이 영화를 본 친구는 언론사는 아니지만 출판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아마 그 친구에게도 이 영화는 무척 흥미로웠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강한 이익집단이 살인극의 주인공이 아닌 것으로 끝나고 나면서 그의 한 마디는 영화의 색다른 해석을 던져 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강한 이익집단이 살인극의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것을 보고 이익집단의 힘을 느낀다고. 그의 말에 나 역시 말 못할 수긍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을 비판하는 영화에서 도리어 그들의 힘을 느끼는 아이러니에 대해 뭔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는 것이 우리들만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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