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을 다루는 코언 형제의 솜씨... ★★★★
영화의 시작이나 배경음악은 그럴 듯하다.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지구. 시선을 쭉 따라 내려와 CIA 건물 내부로 시선이 이동하는 오프닝 장면은 대단한 첩보 스릴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멋들어지게 시작하는 영화, <번 애프터 리딩>은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얘기를 가지고 95분 동안 끌고 나간다. 게다가 이 스파이 영화처럼 보이는 영화(?)엔 단 한 명의 스파이도 나오지 않는다.
헬스클럽에서 일하는 채드(브래드 피트)는 우연히 비밀 정보원의 일급 기밀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CD를 발견한다. 성형 수술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고 있던 동료 린다(프랜시스 맥도먼드)와 함께 CD의 주인인 오스본(존 말코비치)과 접촉해 돈을 요구하지만 상황은 꼬여만 간다. 한편, 오스본의 아내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남편이 퇴직하자 그간 몰래 만나온 애인 해리(조지 클루니)와의 결혼을 위해 이혼 소송을 준비한다.
매우 서늘하고 냉혹했던 코언 형제의 전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다음 작품인 <번 애프터 리딩>은 놀랍도록 가볍고 유쾌하며 허무하다. 여기서 허무하다는 건 ‘허당스럽다’와 동일한 의미다. 채드와 린다가 꿈에 부풀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CD는 고작 3급 비밀을 취급하는 오스본의 회고록과 개인 재정 등이 담겨져 있다. 러시아 대사관, 심지어 CIA 간부조차 별 관심 없어 하는 CD, 그러니깐 이건 일종의 맥거핀 수준도 되지 않는 허상일 뿐이다.
<번 애프터 리딩>의 인물들은 모두 허상에 눈이 멀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게다가 이들은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을 위한 존재들이다. 정부에서 일하건, CIA에서 일하건 이들에게 애국심이라든가 공적 목적의식 따위는 애초부터 없다. 린다는 단지 성형 수술에 필요한 자금을 위해 국가기밀을 러시아 대사관에 팔아넘기려 하고, 더 많은 정보를 위해 오스본의 자택에 숨어 들어가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CD구매를 러시아 대사관이 거부하자 다음은 중국 대사관으로 갈 것이라고 호통치는 린다는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는 CIA로부터 결국 원하는 자금을 얻게 된다.
또한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서로 얽히며 서로를 속고 속인다. 그러면서 별 것 아닌 이야기는 가지를 뻗고 복잡하게 꼬여간다. 단적으로 예를 하나 들면, 케이티는 남편과 이혼하고 해리와 결혼하려 하지만, 해리는 본부인에게 돌아가려하고, 본부인은 해리를 상대로 이혼을 준비 중이다. 뭐 이 따위 영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서로의 관계는 좌충우돌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강박적으로 대응하고 파국으로 내닫는다.
무엇보다 <번 애프터 리딩>은 정말 웃긴다. 기밀이 담겨 있다는 CD를 넘겨받은 러시아 대사관 직원이 고작 “PC냐 Mac이냐?”를 묻고, 해리가 지하에서 몰래 만든 물건은 여성용 자위기구다. 해리를 감시하다 들킨 법률회사 직원은 앞뒤의 주차 차량을 박살내며 도망가고, 린다는 CIA 끌려가서까지 수술비를 달라며 앙탈이다. 특히 브래드 피트의 촐랑대는 모습은 압권이다. 망가진 모습조차도 귀엽고 멋지다.
시종일관 대단한 스릴러가 펼쳐질 것처럼 음산한 음악과 긴장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만들어 내는 <번 애프터 리딩>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닌 것(허상)을 다루고 있다. 이것을 어떤 것에 대한 비꼼으로 받아들이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 이걸 보면서 떠오른 생각 중의 하나는 예전에 주요 언론의 1면과 TV 뉴스의 첫 꼭지를 차지했던 어마어마한 간첩사건들 중에서 어떤 사건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말 이게 간첩사건 맞는 건지 의아한 경우가 있었다. 고작 일간지나 주간지 기사를 모아서 제공하는 게 간첩의 행위라니. 차라리 린다처럼 수술비를 위해 주운 CD를 건네는 게 왠지 훨씬 더 간첩(스파이)같지 않은가. 암튼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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