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얼마만큼의 희생이 필요한 것인가... ★★★★
뛰어난 영상으로 흥행에 성공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300>이 내 기억엔 매우 괴로운 관람시간으로 남아 있다. 뛰어난 기술적 성취라는 그릇에 담긴 두 눈 뜨고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노골적인 서구 우월주의와 호모포비아. <300>이 개봉됐을 당시 이런 논란에 대해 잭 스나이더 감독은 ‘자신은 그저 원작을 충실히 재현했을 뿐이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런 점에서 <300>과 <왓치맨>이라는 두 작품만을 놓고 보면, 잭 스나이더 감독은 아티스트라기보다는 기술자 쪽에 좀 더 가까워보인다. <왓치맨>은 원작을 무난히 재현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앨런 무어, 데이브 기븐스의 만화 <왓치맨>의 영화화는 무려 18년 동안의 프로젝트가 맺은 결실이다. 1986년 이십세기 폭스가 판권을 사면서 시작된 영화화 프로젝트는 세 명의 감독(테리 길리엄, 폴 그린그래스, 대런 애로노프스키)이 중도 포기하면서 잭 스나이더 손으로 넘어왔고, 각본가와 제작사도 세 번의 교체와 변경을 경험해야 했다. 게다가 각본은 조지 부시가 지배하는 200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등 엄청나게 변질되어 있었고, 잭 스나이더가 감독을 맡은 후 처음 한 일이자 가장 잘 한 일은 각본을 원작에 맞게 수정한 것이라 한다.
아무튼 <왓치맨>은 대체 무슨 내용인가? 때는 1985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하는 슈퍼히어로 코미디언(제프리 딘 모건)이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추락사한다. 동료 로어셰크(재키 얼 헤일리)는 이것이 슈퍼히어로들을 노리는 연쇄살인이라고 단정하고 은퇴한 동료들에게 경고한다. 로어셰크와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은 1977년 코스튬을 입은 히어로들의 활동을 금지한 ‘킨법령’에 의해 현역에서 은퇴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부의 인정을 받아 활동하는 슈퍼히어로는 코미디언과 진정한 초능력자 닥터 맨해튼이 유일하다. 미국 전쟁 억지력의 상징인 닥터 맨해튼은 자신과 알고 지낸 사람들이 모두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충격 받아 화성으로 이주해 버리고, 미국과 소련이 벌일 제3차 세계대전은 눈앞으로 다가왔으며, 핵전쟁의 위협과 슈퍼 히어로 암살사건의 뒤에는 누군가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일까? <왓치맨>은 대체 역사 장르를 다루고 있다. 대체역사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현실과 다르게 일어났더라면 현재는 어떻게 변했을까란 가정 하에서 출발한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이 여전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다는 가정을 한 <2009 로스트 메모리즈> 같은 영화들. <왓치맨>의 배경인 1985년은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닉슨 대통령이 헌법을 개정해, 3선에 성공하면서 암울한 독재 국가가 된 미국을 그리고 있다. 베트남 전쟁의 승리는 초능력자인 닥터 맨해튼과 코미디언 등 슈퍼 히어로의 활약 때문에 가능했고, 케네디 암살도 코미디언의 짓이다. 이제는 희미해진 극단적 냉전 대립의 시대가 바로 <왓치맨>의 시대인 것이다.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암울했지만 이미 경험한 과거가 더 그립다"
어두운 영상과 특히 초고속 카메라를 이용한 액션 장면에서의 독특한 영상미는 <300>에서도 이미 만끽한 만큼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잭 스나이더의 최대 공로는 원작을 거의 그대로 화면으로 옮겨 놨다는 점이다. 만화 속 만화와 같은 일부 장면들이 사라지고 결말부가 조금 변하긴 했어도 장황하면서도 모호한 대사까지 그대로 재현된다. 여기에 1985년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감흥을 불러온다. Bob Dylan의 <The Time They Are A-Changin'>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오프닝 장면이나, Nat King Cole의 <Unforgettable>, Simon & Garfunkel의 <The Sound Of Silence> 같은 주옥같은 곡들이 화면 위를 수놓으며, 특히 실크 스펙터(말린 애커맨)와 나이트 아울(패트릭 윌슨)의 비행정 정사 장면에서의 Leonard Cohen의 <Hallelujah>는 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기막히다. (영화 속 노래 중 가장 반가웠던 노래는 독일 출신인 Nena의 <99 Red Balloons(Luft Balloons)>였다. 그 동안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노래인지라 더 반가웠는데, 안타깝게도 OST에선 이 노래가 빠져 있다. 왜???)
<왓치맨>을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해서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를 예상하고 본 사람들이라면 실망과 함께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을 법하다. <왓치맨>의 슈퍼히어로들은 닥터 맨해튼을 제외하고는 그저 일반 사람들보다 훈련으로 다져진 조금 뛰어난 육체적 능력이 있을 뿐이고, 법률에 의해 규제되는 존재다. 게다가 이들은 인류 전체의 선을 지향하는(?)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미국의 선,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국 정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베트남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남미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며, 국내 반정부, 반닉슨 시위를 진압하는데 동원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하는 구사대 업무도 맡았으리라. 이런 점에서 “신은 존재한다. 그 신은 미국인이다”라는 대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설정만 이러한 게 아니라 액션 장면도 거의 없다. 그러니깐 <슈퍼맨>, <스파이더맨>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기는커녕, <다크나이트>에서처럼 거대한 화물차가 뒤집어지는 정도의(?) 그럴듯한 장면도 없다는 얘기다. 반면 일부 장면은 꽤나 잔인하고 끔찍하다. 옆에 앉은 여성이 간간히 눈을 돌리며 괴로워할 정도로. 그리고 웬 대사는 이리도 많은지. 그 수많은 메타포와 날줄과 씨줄처럼 얽히는 내러티브, 그리고 맥거핀들은 꼭지를 돌게 만든다. 원작을 읽고(!) 봤음에도 여전히 애매모호하고 난해하다. (만화임에도 읽었다는 표현을 쓴 건 그 엄청난 텍스트 양 때문이다) 오죽 했으면, 미국의 유명 평론가인 로저 에버트조차 ‘내가 정확히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얘기했을까.
아무튼 <다크 나이트>도 그랬지만, <왓치맨>을 보면 슈퍼히어로 영화를 이토록 어둡고 철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근데 왜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의 슈퍼히어로 영화는 거의 없거나 있다고 해도 코미디 또는 키치적인 B급 무비에 머무르는 것일까? 반면 영화 속 미국의 슈퍼히어로는 진짜 현실인 것처럼 두 눈 똑바로 뜨고 구라를 쳐도 별로 우습게 여겨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미국이라는 슈퍼 강대국의 지위와 슈퍼히어로가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며, 거기에 자경단의 뿌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경단은 분명히 현대 법체계의 이단이며, 불법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이리저리 쫓겨 다닌다.
<왓치맨>에서도 히어로들은 법에 의해 활동이 규제되며 닥터 맨해튼과 코미디언만이 정부의 인정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활동한다. 말 그대로 만화적 상상력의 산물인 닥터 맨해튼을 예외로 보자면, 코미디언은 국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파시스트적 국가주의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국가의 본질 자체에 파시스트적 속성이 있음을 감안한다 해도) 이와 극점에 오지맨디아스가 있으며, 그의 철학을 보면 극단적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에선 오지맨디아스가 코미디언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폭력적 만행을 제지하려다 두들겨 맞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오지맨디아스는 자신과 코미디언이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임을 알아챘다고 말한다. 즉, 극과 극은 통한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극단적 국가주의자와 극단적 무정부주의자, 둘 모두는 전체(어떤 것이 전체냐는 건 다르겠지만)의 이익을 소수의 폭력적 배제를 용인한다. 따라서 코미디언이야말로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으로 봤던 오지맨디아스의 시선에서 볼 때, 코미디언은 결국 순진한 국가주의자, 또는 철학 없는 마초주의자에 불과했을 것이다.(벌벌 떨며 눈물 흘리는 코미디언이라니) 한편, ‘로어셰크’는 노동계급 출신이면서 노동계급을 탄압하는 국가주의에 봉사했다(여전히 국가주의에 봉사하고는 있지만 사회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폭력성으로 인해 배제된다)는 점에서 그는 출신 계급의 배반자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닥터 맨해튼은 극단적 허무주의자로 보이긴 하지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반대로 ‘무지론자’(알 수 없다, 알아봤자 소용없다)의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왓치맨>이 제기하는 철학은 우선 영화 속 대사 그대로 “왓치맨은 누가 감시할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는 행정, 입법, 사법이 독자적 권리를 행사하되 서로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이상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3권 분립의 견제와 감시는 때때로, 자주 지켜지지 않으며 보통 ‘그것이 현실’이라는 말로 치장되어 포기된다.(현실의 대한민국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어쨌거나 이들은 일상적으로 감시당한다. 이들을 감시하는 가장 주된 주체는 ‘언론’이다. 원작에선 끊임없이 신문의 헤드라인이 등장하며, 구체적인 신문사의 이름과 제목, 기사가 만화의 주요한 흐름을 잡아가기도 한다. 문제는 그러한 언론은 감시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거대 언론사가 신문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특히 그러하다. 물론 언론사별로 이념과 가치관에 따라 서로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힘이 균형이 절대적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큰 영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이보다 더 심오한 주제는 과연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가?’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코미디언이나 오지맨디아스는 전체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필요하다는 입장에 동조한다. 문제는 그 희생의 정도다. 물론 영화의 결말을 미리 알려주고 지구의 평화를 위해 희생이 필요한가라고 물어본다면 100명이면 100명 모두 ‘미친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닥터 맨해튼, 나이트 아울, 실크 스펙터는 벌어진 참상에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온 현실의 평화를 보며 긍정성을 인정한다. 최소한 침묵하기로 동의한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는 파시스트적 속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복수를 위해 무차별 살상을 저지른 끝에 사랑하는 가족까지 죽인다는 원작 만화 속 만화는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끝까지 저항하는 건 노동계급 출신의 ‘로어셰크’ 뿐이며, 그 위에 싹튼 건 소수(!)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거짓된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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