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혼자놀기의 진수... ★★★
흔히들 테리 길리엄 감독을 광기에 사로잡힌 감독이라고들 한다. 작품 자체도 그러하거니와 촬영 현장에서의 실제 모습도 그렇다고 한다. 그의 광기어린 상상력은 <브라질>과 같은 영화사에 남을 걸작을 탄생시키기도 했고, 또 <그림형제 : 마르바덴의 숲의 전설>처럼 테리 길리엄 감독의 작품으로 보기엔 순한 작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게 그의 영화는 극단적인 호불호의 대상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타이드랜드>의 초반부 장면들, 그러니깐 11살의 어린 소녀가 능숙하게 마약주사를 다루는 장면 같은 것은 테리 길리엄이 아니라면 쉽게 표현하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빠에게 마약 주사를 놔주는 소녀 질라이자 로즈(조델 퍼랜드)의 현실은 팍팍하다 못해 암울함 그 자체다. 부모는 모두 마약 중독자에 엄마는 초콜릿을 먹으려는 딸의 손을 가차 없이 때릴 정도로 독한 모정을 과시한다. 소녀가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만의 판타지 밖에는 없다. 이렇게 보면 로즈는 <판의 미로>의 오필리아와 비슷한 처지로 보인다. 물론 두 영화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판의 미로>에 대한 모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녀의 판타지와 암울한 현실(단지 소녀의 현실만이 아니라 스페인의 현실)의 경계가 정밀하게 교차해 나가는 <판의 미로>에 비해 <타이드랜드>의 그것은 흐리멍텅하고 터무니없이 지루하다.
머리만 남은 인형만이 유일한 친구인 로즈는 엄마의 죽음 앞에서 ‘이제 초콜릿을 먹을 수 있다’고 좋아할 정도로 현실과는 유리된 삶을 살고 있다. 상상 속의 ‘유틀랜드’(사실은 할머니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빠도 마약 중독으로 사망해 홀로 남은 로즈는 역시 정신세계가 이상한 델(자넷 맥티어)과 그녀의 동생 디킨즈(브렌단 플레처)를 알게 되면서 그들과 소통해 나간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함인지 쉽게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타이드랜드>는 조델 퍼랜드라는 가공할 소녀의 일인극이나 다름없다. 특히 초중반부의 거의 한 시간은 조델 퍼랜드 혼자 떠들고 혼자 노는, 가히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중반부 이후 등장하는 델과 디킨즈의 역할은 미미하다 못해 뚜렷한 존재감도 없다. 델과 디킨즈의 이야기나 그들과의 관계에서 뭔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어설픈 결말로 은근슬쩍 마무리가 되어 버린다. 어쩌면 델과 디킨즈의 기묘한 모습도 질라이자 로즈의 눈에 비친 판타지로 이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 종잡기 힘들고 멍청하며 지루하기까지 한 판타지 영화에서 장점이라면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선은 영상이다.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영상은 말 그대로 한 장의 그림(정말 그림같다)을 보는 듯한 느낌을 안겨 준다. 질라이자 로즈의 시선에 따라 좌우로 기울어지는 들판의 모습도 이채로우며, 한편으론 꽤나 그로테스크하다. 또 하나는 조델 퍼랜드라는 아역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이다. 나는 조델 퍼랜드가 <사일런트 힐>을 찍은 다음에 이 영화를 찍은 줄 알았는데, <타이드랜드>가 데뷔작이다. 세상에. 데뷔작부터 이런 연기 포스를 보여주다니. <사일런트 힐>에서의 그 기괴한 연기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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