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좀 당해도 싸다... ★★★★
고작 1천만원으로 제작한 영화라더니, 아마도 제작비의 대부분은 술값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싶게 영화의 대부분은 음주 장면이다. 당연하게 청소년관람불가일줄 알았는데, 15세 이상 관람가다. 그렇다면 주식을 다룬 <작전>이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건 왜일까? 청소년에게 술은 되지만 주식은 되지 않는 것일까? 왠지 좀 이상하다.
암튼 제목이 <낮술>이다. 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낮술 마시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 말처럼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제정신 못 차리는 수컷들에 대한 비아냥의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 영화는 처음부터 술자리로 시작한다. 얘기를 듣자하니 여자 친구 지혜(여동생과 이름이 똑같다)와 헤어진 혁진(송삼동)을 위로한답시고 친구들은 술김에 정선 5일장을 보러 가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다음날 혁진만이 정선 터미널에 나타나고 친구들은 술에 취해 뻗어 자는 중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혁진이 겪는 낯선 곳에서의 로망과 고난을 하나 가득 늘어놓기 시작한다. 얼큰하게 취하는 알코올 향기와 함께.
이 영화는 일단 기막히게 코믹하다. 웃기기 위해 오버스런 행동을 한다든가 개콘에 나올만한 유행어를 읊어 대는 것도 아닌데, 웃기다. 처음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돌이켜 보면, 혁진이 강아지 밥 줘야 한다며 내일 정선에 가기 힘들다고 말하자, 친구들은 일반적인 예상 답변 - ‘그깟 개새끼’ 운운하는 - 대신, “개가 3살이면 지가 알아서 밥 먹어야지”라는 다소 엇박자의 순한 대응을 한다. 그런데 웃긴다. 펜션에서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혁진의 모습은 그 자체로 포복절도할 웃음을 안겨 주는데, ‘젊은 놈이 참 한심하다’ 싶긴 하지만, 내가 저 입장이라도 딱히 할 건 없어 보인다. 그저 혼자서 소주잔을 기울일 밖에. 이렇듯 이 영화의 웃음 코드는 일상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말과 행동에서 유발되는데, 생각해보면 그저 다람쥐 쳇바퀴 순환하듯 무료한 우리네 일상도 충분히 유쾌할 수 있다는 반증으로도 읽힌다. 거기에 헤어진 애인과 동생의 이름이 같다는 점을 초반에 잠깐 언급해 놓고는 후반부에 와서 웃음의 코드로 활용하는 장면은 대단히 참신하고 기발하다.
다음으로 이 영화는 대단히 호러틱하다. 공포스럽다. 여행자가 낯선 곳에서 당하는 곤란한 상황은 공포 영화의 대표적인 클리셰이다. <낮술>을 더 강하게 밀어 붙이면 <구타유발자들>의 영상이 아른거린다. 특히 게이 아저씨를 피해 몰래 공중전화를 걸던 혁진을 바라보는 아저씨의 표정과 피곤해서 낮잠을 자는 혁진을 가위 누르는 란희의 표정은 웬만한 공포 영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무섭다. 실제 이 장면에선 여성 관객들의 신음소리가 배어나오기도 했다.
사실 혼자 또는 동성끼리 가는 여행에서 멋진 이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상상은 누구나 한번쯤은 해볼 판타지이며 로망이다. 최근엔 거의 못 갔지만, 예전엔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는 혼자서 여행을 떠나고는 했다. 특별히 정해진 경로 없이 터미널에서 평소 가고 싶었던 지명이 눈에 보이면 무작정 떠나고는 했다. 그러면서 항상 나름의 상상을 해 본다. 버스 옆자리에 혼자 여행 가는 이쁜 처자가 앉는 건 아닐까? 아니면 영화 속 혁진처럼 혼자 묵게 된 숙소에 여자끼리 놀러온 일행과 어울리게 되는 건 아닐까? 물론, 이런 상상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러니깐 <낮술>은 여행자들이 가질만한 상상을 로맨틱한 방향이 아닌 정반대의 악몽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 상영 내내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유쾌하게 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남성들에게 이 영화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게 다가올 수도 있다. 왜냐면 혁진으로 대표되는 수컷은 된통 당하고 나서도 뒤돌아서면 바로 까먹고 똑같은 행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진의 찌질한 행동을 보면서 “넌 좀 당해도 싸”라고 얘기하는 것은 혁진만이 아니라 여자와 술이라면 헤벌레하며 따라나서는 나를 포함한 모든 남성들을 향한 외침이다.
※ 전반적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된 이 영화에서 가장 애매모호하게 처리된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혁진이 혼자 여행을 하게 되는 동기 부분이다. 왜 이 부분이 의아하냐면,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술을 마시다 여행을 가기로 했다면 다음날 같이 모여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같은 지역에 사는 친구들이 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같이 출발하지 않고 도착지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설정은 좀 빈약하다.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던져주든가. 암튼 예상해 보기로는 이 부분을 두고 감독이 고민 끝에 이렇게 처리했을텐데 그다지 설득 가능한 장면은 아니었다.
※ 엔딩 크레딧이 이 처럼 짧은 영화도 보기 힘들 것이다. 우선 노영석 감독은 감독에 제작, 음악, 촬영, 편집, 미술에 OST도 직접 작사작곡노래까지 모든 걸 소화해 내고 있다. 심지어 횟집 주인 목소리도 감독의 몫이었다고 한다. 엄청난 서스펜스를 만든 경포대가는 버스 옆에 앉은 란희 씨..ㅋㅋㅋ.... 조감독에 스크립터다. 그리고 혁진이 처음 잘못가게 된 펜션의 주인은 연출부의 윤수안이다. 너무 알뜰한 캐스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