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필자)의 나래이션 :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바로 그 지갑이야기입니다. 지갑이 있으면 물론 편리하지만 한 번 잃어버리면 모든걸 잃어버리게 되죠. 근데 묘하게 그 잃어버릴 위험에 대해서는 절박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지갑이 발명된이상 사용할수밖에 없죠.
문제는 지갑의 진화된 형태들에서 분실은 그 이름을 바꾼다는 거죠. 분실이 주인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라면 이제 지갑의 진화태들은 주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강탈됩니다. 지갑의 취약점을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거죠 그러나 불가해한 점은 악용해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들의 강탈동기를 설명해야 할까요. 그들을 교육받은 자들로 상정해보면 설명이 좀 용이해집니다. 지갑 진화태의 강탈은 육탄전이 아닌 네트컴페티션을 통해 발생하니까요. 결국 교육받은 강탈자들의 동기는 사상적 이념적 수준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애플시드의 할코니즘과 같은 '모두를 하나로'라던가 같은것들 말이죠. 올림푸스국의 전세계 위성 통합 통제 계획도 결국 악용되고 말았죠. 올림푸스의 총리는 위성통합이 그리스 이상제국의 엠볼렘이라 할 수 있는 올리브나무를 구현할것이라 장담했지만 실제로는 엘리자베스 샌더의 적일수(赤一樹)를 구현하고말앗죠
모두가 하나로에 대해 집착하는 사조는 애플시드때부터 개발된듯...이 사조는 시로 마사무네가 창조한 캐릭터중한명으로부터 발생한듯하고 사실 할콘의 핵(核)에서 울고있었던 엘리자베스샌더의 사념으로 미루어볼때 이 캐릭터 혹은 캐릭터가 작가를 대변할수있다면 시로마사무네는 할코니즘을 부정하고 비판하는듯합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폐단들이 여럿 발생했고 이에 책임감을 심하게 느낀 시로 마사무네는 공각기동대에서 일종의 파시즘이라 할 수 있는 이 모두가 하나로라는 슬로건(?)을 부정하지않고(부정은 이미 애플시대에서 했으나 먹히질 않앗습니다) 매력적으로 혹은 마력적으로 진화시켜버렸습니다.
애플시드의 작품성(?)이 낮아져버린 이유는 네트이야기 그러니까 지갑의 진화태이야기를 할때는 소재자체가 이미 포스트휴먼적이기에 소재의 감정이라 할만한것은 제거되는게 정합론적으로는 가장좋고 즉 학문적완성도는 가장높고(그러나 완전 제거시켜버리면 이것은 더이상 문학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왜냐하면 문학은 인간을 다루므로) 제거할수 없다면 절제라도 시켜야합니다. 최대한 쥐어짜내서 감정의 앙금만 남기고 모두 증발시켜야합니다. 이것을 훌륭히 해낸것이 공각기동대이고 애플시드의 경우 감정의 홍수속에서 소재와 사상은 저급한 부조화를 이루며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작품성을 따질때는 위와같다고 해도 영화감상후 일상복귀 후유증에 관해 논하자면 애플시드를 보는게 월등히 좋다. 후유증 제로에 가까울것이고 공각기동대를 본다면 정상적인 일상복귀가 힘들어보이며 후유증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평생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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