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칸느라는 이름으로 함축될 수 있는 국제화 속의 경쟁력, 정체성이라는 가치가 영화의 키워드처럼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생각에 그것 또한 또 다른 함정이다.
함정을 벗어나 자유로와지려는 순간 또다른 함정이 조용히 찾아온다.
그것은 데블스애드버킷의 알파치노처럼 형태를 바꾸고 브로드캐스트뉴스에서 순수한 앵커가 말했듯 굳이 악마의 형태를 하고있지도 않다.
거장의 작품을 함부로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려섞인 팬레터처럼 말하고 싶은 바는, 영화는 이미 그 시작에 완벽한 형태를 운명처럼 갖고있는 것은 아니겠느냐 하는 나름대로의 (편견일지도 모르는) 견해이다.
취화선은 변화와 자유를 꿈꿨던 천재화가의 일대기를 다루는 영화이다.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그의 자유혼을 느끼고 그 힘을 폭발시키는 곳에 답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언뜻 아마데우스를 연상시키는데 아마데우스의 주인공은 모짜르트가 아니라 살리에르라는 것이 내 견해다.
그것은 천재성은 없으나 천재를 느끼는 시각은 있었던 평범한 음악가의 분노와 갈등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통찰하게 만드는 영화다.
한편 취화선은 이를테면 모짜르트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다.
나는 좀더 장승업의 내면세계를 추적할 필요가 있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내 속에서 이 영화는 최근의 영화였던 폴락과 연결된다.
애드 해리스가 연기한 잭슨 폴락은 최민식의 장승업에 비해서 훨씬 인간적이고 피가 흐른다.
반면 최민식의 장승업은 소설책의 삽화처럼 맥이 끊긴다.
그의 감정은 수려한 자연경관에 묻히고 역사적 상황묘사에 의해 거세된다.
나는 출생과 무식에의한 그의 컴플랙스가 좀더 입체적으로 다가오길 희망했으나 잘 다듬어진 문장하나가 그 만만치않은 복잡한 심사를 대변하고 만다.
좋게 보면 이것은 공들여 세밀하게 조각한 서양조각이 아니라 여백이 많고 일필휘지로 그어진 동양화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다만 나의 취향이 달라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기와지붕위에서 절규하는 장승업의 그림이 좋았다.
내 기억속에 장승업의 얼굴표정이 천변만화하여 그의 피가 느껴지고 그의 고뇌가 만져지고 그의 오만과 광기가 화면 밖을 튀어나오길 바랬다.
전해지는 이야기조차 적었던 장승업이기에 임권택 감독의 상상력과 역사관에대한 조심스러움 그리고 그 분의 영화에대한 기본적인 정직함이 이 모든 것을 구축하기에는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라면 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먹의 농담으로 가득한, 먹물 냄새가 흠씬 풍기는, 거칠은 듯한 화선지의 구겨짐이 느껴지는 한국화를 위한 설정.... 전반적으로 거칠고 냄새나는 듯한.... 장승업의 머릿속은 구름과 학이 나는 선경.... 자유로운 곡선이.... 소인배들의 배경에는 직선적이고 틀이 많은 답답한 구조들이.... 풍경은 다만 한국적인 것 이외의 더 많은 장치로 역할할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