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감독의 장편 첫 데뷔작은 '성공 반, 실패 반'이라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의 근거는 그를 아는 이들의 (상업성의)비판과 그를 몰랐던 이들이 (비상업성의)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두 가지의 모습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용 감독의 첫영화인 [정사]은 성공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군더더기를 빼버린 화면구성 덕분에 혹자는 음악과 이미숙과 이정재의 섹스씬만 남더라는 얘기를 했지만 회색톤으로 도배된 미술과 미니멀리즘적인 냄새를 풍기는 소품... 그건 분명 굉장히 세련된 현대풍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 [순애보]에서 이재용 감독은 역시나 하며 [정사]의 모습을 유사하게 풍기고 있다. 극 중 주인공 '아야'가 인터넷방송 촬영을 하는 세트는 [정사]의 그것과 같다. 주인공 '우인'의 고독은 그 수위만 낮을 뿐 [정사]의 이미숙과 같다. 좀 다르다면 청담동이 신림동이나 봉천동으로 내려앉은 것 같은 극히 소시민적인 영화의 배경이다.
하지만 난 이 영화 [순애보]를 보면서 자꾸만 이재용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다려진다. 그 이유는 [정사]에서 비워진 것을 [순애보]가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라는 촌스러운 말투에 웃지 못한 것은 포르노사이트의 연연하는 '우인'의 고독이 내게 와닿았고, 이제는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순수'라는 단어가 내마음을 아프게 때렸다.
신체의 고통에는 민감하지만 정신적 불구가 되어가고 있는 나에게 이 영화는 오랜만에 보는 단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