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전형을 깨보자.......★★★☆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담당하는 해롤드 크릭(윌 패럴)의 삶은 오직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지난 12년간 그는 정확히 11시 13분에 잠자리에 들고, 좌우상하 38번씩 칫솔질을 하며,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의 여섯 블록을 57걸음씩 걸어 8시 17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직장에 갔다. 이런 해롤드에게 어느 날 아침 자신의 행동을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서술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해롤드 자신이 생각하는 내면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예측한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해롤드는 영문과 교수 힐버트(더스틴 호프먼)에게 상담을 구하고, 이들은 이 이상한 상황이 한편의 소설은 아닌지 의문을 품으며 작가를 찾아내려 한다.
나의 삶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설명하는 목소리가 나에게 들린다는 설정은 실제에서 가능할 것인가? 당연하게도 불가능하다. 그럼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이와 같은 설정은 영화이기 이전에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 이런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즉 영화 전체는 한 편의 소설이며, 소설 속에 작가 자신이 한 명의 인물로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전체가 한 편의 소설이라는 사실은 이 영화를 관람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가? 특별한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대다수에게는 하등 상관없는 요소일 뿐이다. 다만, 죽기 싫은 일인(주인공)과 어떻게 죽여야 하나 고민하는 일인(작가), 그리고 꼭 죽여야 한다는 일인(비평가)의 존재는 이 영화의 긴장을 유지하는 핵심 기제라는 사실만은 추출하자. (그 중에서 엠마 톰슨의 연기와 존재감은 정말 대단한 포스였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 가볍게 볼 수 있는 귀엽고 로맨틱한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철학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생각해보자. 일분일초도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 왔던 세계에 작은 파열음이 생긴다. 고작 1분 정도의 오차일 뿐이다. 그런데 그 작은 오차는 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서운 균열을 만들어 낸다. 이는 북경의 나비 날개짓이 뉴욕에 폭풍을 불러일으킨다는 ‘나비 이론’ 또는 ‘카오스 이론’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작은 세상 이론’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쿠키나 밀가루와 같은 작은 물건이 남녀의 사랑을 이끌어 내기도 하며, 알람 용도로 더 많이 쓰이는 손목시계가 주인의 목숨을 살리기도 한다. 언어의 물질화, 어떤 경우엔 농담처럼 얘기한 ‘사랑한다’는 고백이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그 아무리 소소한 일상이라도 소중한 것이라고 얘기해주는 것만 같다.
그런데, 나에겐 영화가 주는 소중한 의미도 중요하긴 했지만, 전형성을 깨는 일탈의 즐거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최근 새 앨범을 발표한 자우림의 노래 중에 내가 아직도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1집에 실려 있는 <일탈>이라는 노래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선보기 하루 전에 홀딱 삭발을/비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모두 원해 어딘가 도망칠 곳을 모두 원해/뭔가 색다른 곳을/모두 원해 나도 원해/…> 일반적으로 확 저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탈의 욕구를 더 많이 느낀다고 하든가. 아침에 출근 전철을 타지 않고 훌쩍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볼까? 오래 전 나의 로망 검은색/하얀색 Fender Stratocaster를 사버릴까? 아니면 니콘 D-300이나 라이카 M6, 또는 그것의 디지털화 엡손 R-D1을 미친 척하고 사볼까? 혹시 아는가. 일탈을 감행하다 보면 Maggie Gyllenhaal같은 매력적인 여성과 로맨스가 만들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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