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의 카리스마에 취하다....★★★☆
언제부터인가 어느 극장을 가든지 비범한 아우라를 내뿜는 안젤리나 졸리와 부드러운 이미지의 제임스 맥어보이가 나오는 액션 영화 <원티드> 광고가 온통 화면을 장식했더랬다. 제임스 맥어보이가 액션영화를? 내가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나니아 연대기>의 부끄럼 많은 반인반수 툼누스로부터 시작되어, 최근 <비커밍 제인>, <페넬로피>, <어톤먼트>를 거치며 제임스 맥어보이는 가장 부드러운 로맨틱 가이로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다. 그의 가장 큰 단점은 아마도 단신?(영화에서도 슬론은 처음 웨슬리를 보자 ‘의외로 작군’이라며 첫 인사를 건넨다) 그런 제임스 맥어보이가 액션영화를 찍는다고? 과연 어울릴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임스 맥어보이 자체로도 괜찮지만 안젤리나 졸리의 카리스마와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
당연하게도 나는 이 영화를 안젤리나 졸리 때문에 봤다. 극장에서 수차례 봤던 광고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씩 웃으며 미끄러져 내려가던 그 모습은 내 눈을 잡아 놓기에 충분했다. 영화의 초반부는 상사의 잔소리에 짓눌려 사는 평범하고 소심한 월급쟁이의 모습을 꽤나 세밀하게 보여준다. 비슷한 다른 영화들이 변신 전의 평범한 모습은 대충 보여주고 액션의 세계로 빨리 접어드는 반면, <원티드>는 액션남으로 변신하기 전 웨슬리의 생활 묘사에 공을 들인다. 그래도 지루한 구석은 별로 없고 변신하기 전의 모습도 충분히 유쾌하게 감상할만하다.
어쨌거나 소심하고 바보 같은 삶을 살아오던 웨슬리(제임스 맥어보이)에게 폭스(안젤리나 졸리)가 나타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어릴 때 집을 나갔던 아버지가 최고의 암살자로 며칠 전 살해당했으며, 그 범인이 자신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뛰어난 암살자의 재능이 유전되어 있다. 소심함의 표현인 줄 알았던 심장박동 증가는 잘만 조정하면 작은 물건을 크게 보이게도 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느리게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통장에 수백만 달러의 유산이 입금되어 있음을 확인한 웨슬리는 괴롭히던 직장 상사에게 거침없는 악담을 하고, 자기 애인과 바람피우는 직장 동료의 턱주가리를 키보드로 갈겨준 뒤 폭스를 따라 나선다.
이때부터 영화는 화려한 액션의 세계로 들어간다. 총을 한 번이라도 쏘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총알은 정확하게 직선으로 날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총 내부에 그어져 있는 강선 때문인데, 강선을 따라 총알은 회전하면서 밖으로 나가게 되고, 직선이 아닌 위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그래서 지휘관이 적군이 밀려오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사격 개시!’를 외치는 시점이 바로 총구와 총알의 궤적이 일치하는 시점인 것이다. 위아래는 그렇다 치고 좌우는 어떨까? 아마도 바람이라든가 온도와 같은 외부 요인들이 작용, 총알이 어느 정도는 휘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원티드>에서 발사되는 총알은 어쩔 수 없이 작용하는 물리 법칙을 훌쩍 뛰어 넘어 자유자재로 휘어 장애물 뒤의 목표물을 맞힌다. 심지어는 목표물을 차례대로 관통한 총알이 원형을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로 날아온다. 휘는 총알은 암살자로서의 자격이 완성됨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 영화가 발 딛고 선 판타지한 배경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부서지는 키보드의 글자판이 ‘FUCK YOU’를 만든다든가 날아가는 총알에 ‘GOOD BYE’라고 새겨져 있는 장면 등도 매우 판타지하고 유머러스하다)
물리적 법칙을 뛰어 넘는 장면들 - 휘는 총알, <스피드 레이서>를 연상시키는 점프해서 뛰어 넘는 카체이스 장면 등 - 이 <원티드>의 이미지라면 <원티드>의 철학적 배경은 의외로 매우 심오하다. 직물 노동자들이 만든 천년의 역사를 가진 암살단의 암살명령은 직조 기계가 내린다. 기계가 직물을 짜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명령을 슬론(모건 프리먼)이 조직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럼 기계는 누구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일까? 향후 악을 저지를 사람이 바로 대상자다. 아직은 실행되지 않은 악을 사전 처단한다는 것인데, 기계 대신에 3명의 어린아이를 대입시켜 보면 바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철학 세계와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영화를 보다가 슬론이 폭스에게 내린 ‘웨슬리를 처단하라’는 명령이 기차 탈선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었다. 왜냐면 웨슬리로 인해 기차가 급정거를 하게 되고 계곡으로 열차가 탈선했기 때문이다. 사전에 웨슬리를 처단했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영화에선 보여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물론 <마이너리티 리포트>와는 다르게 <원티드>는 영화의 배경인 철학적 문제를 건드릴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단순한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첫 주말이 지나자 미국과 한국 등에서 올린 기대 이상의 흥행성과에 대해 영화계에서 먼저 놀라는 눈치다.(한국의 경우 2008년 최단 기간 200만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강철중>을 1주 만에 2위로 내려앉히고 1위에 올랐다) 어느 정도는 극장을 중심으로 한 꾸준한 홍보 효과가 빛을 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원티드>는 대중적인 흥행을 올릴 충분한 오락성을 담지하고 있는 영화다. 전체적으로 스토리는 개연성이라든가 완성도에서 좀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마지막에 두 번에 걸친 반전을 마련해 놓음으로서 재미를 만끽하게 해 준다. 대체 왜 키도 작고 평범하게 살아 온 웨슬리를 암살자로 만들어야만 할까? - 여기까지만. 물론 안젤리나 졸리의 카리스마는 영화 흥행의 가장 큰 힘이다. 웨슬리를 전사로 키우는 안젤리나 졸리는 미묘한 얼굴 표정과 손짓, 몸짓 하나만으로도 화면을 장악하는 힘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졸리 좀 짱인 듯... (이 영화에서 혹시 제임스 맥어보이와 안젤리나 졸리의 로맨스를 볼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말 것. 이 영화와 로맨스는 정말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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