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렇게 뛰어난 영화는 아니다. 인상이 깊은 영화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영화가 수작이 아니란 것은 아니다. 한국의 공포영화의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하는 노력이 보여 성실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니, 영화자체로서의 의의는 매우 충분하게 느껴진다.
한국적 공포영화의 한계는 한이다. 공포영화 어디서나 한이 등장하고 한스러움은 곧 괴기스러움과 연결되며, 해결의 종착역이 되어간다. 그것은 나쁘지 않은 점일 수도 있다. 가장 한국적 정서와 동질감을 부여하니까. 하지만 분명 한계점이다. 모든 공포영화가 마지막에는 한스러운 괴기 귀신을 등장시키면서, 너의 한을 풀어줄테니 떠나가라 워이 워이. 이런 영화스토리적 한계는 관객을 끌어들일 수 없다. 오히려 결말을 너무 쉽게 등장시키는 단점이 있어 공포를 반감시키기도 한다.
유사한 패턴과 유사한 이야기 흐름으로 공포영화가 슬슬 지루해지고 따분해지고 있을 무렵에 본 영화는 조금 산뜻한 기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공들여서 색과 시간을 배열하고 인물을 배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붉음과 파랑, 산뜻함과 괴기스러움, 불유쾌함과 기이함이 잘 공존된 공간을 보임으로 공포영화의 몰입도를 조금 높혀주었다.
물론 한적인 요소가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한국적 공포영화가 가장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공포영화를 보다보면 각국의 성향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본의 공포영화는 무엇인가 끝나지 않음으로서 되돌이표라는 느낌이 강하다. 원점,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리고 대상이 다분이 무의식적이고 무작위적이다. 대표적으로 링이나 주온처럼,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 동일하게 있었던 사람들이 대상이 됨으로서 구성원 사이의 공포감과 이질감, 동질감을 보이곤 한다. 그리고 소재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미지 공포가 동반된다. 매우 흥미로운 소재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특유의 공포적 마무리는 꼭 물을 꼭 빼지 않은 슬리퍼를 신었다가 낭패를 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미국적 공포영화는 살을 짓이김으로서 공포를 전달한다. 몸에 가해지는 상해, 생명의 위태로움을 부각하면서 공포로 몰아넣는 것이다. 사실 좀 내 정서에는 맞지 않는다. 얼굴이 잘리고, 손발이 잘리고 피가 튀는 것이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무식해보이기도 한다.
한국적 공포영화는 스토리가 탄탄하지 못하고 효과가 어설프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그 나름의 향취는 가장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장화홍련은 성공한 듯 싶다.
나쁘지 않고 오히려 공포영화로 기억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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