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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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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25 오후 4:4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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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복수는 나의 것>,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성공 후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제작소식을 들었을 때 박찬욱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예전부터 다루고 싶었던 이야기를 였다” 라고…
그가 <복수는 나의 것>의 초고를 완성한 건 5년 전, 이것을 영화화 하면 어떻겠냐는 그의 말에 대한 제작사의 대답은 “NO” 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연출했었던 <달은 해가 꾸는 꿈>이나 <삼인조>는 흥행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고 <복수는 나의 것>의 내용 역시 짙은 사회성을 지녀서 흥행성 보다는 작품성을 강조하는 그런 작품으로 제작사에게 보여졌을 것이리라… 만약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이 없었더라면 이 영화는 아마도 햇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전작의 굉장한 성공 때문에 흥행의 단맛(?)을 이미 본 감독이라 차기작 역시 흥행성을 배제하기가 쉽지 않았을 법도 한데 자신의 작품성향을 고수하려는 그의 고집에서 장인정신 이 느껴졌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런 고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복수에 관한 영화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행위를 한 것에 대해 분노한 다른 사람이 자신이 당한 고통을 준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그리고 그것의 허무함에 대한… 영화는 청각장애자인 청년 류(신하균 분)와 그를 사랑하는 영미(배두나 분)가 신장병에 걸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류의 누나를 살리기 위해 유괴를 감행하게 되고 몸값을 받아 수술비 를 마련하는 데 성공은 했지만 누나는 싸늘한 시신으로 다가오게 되고 유괴했던 아이조차 사고로 사망하자 그들이 계획 했던 모든 그때부터 어지럽게 엉키기 시작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삶의 빛과 같았던 딸을 잃은 아버지 동진(송강호 분)은 세상의 빛을 빼앗아간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복수의 칼을 뽑게 되는데…
감독 박찬욱의 영화 스타일.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슬프다. 그 장르가 액션이던 코미디(삼인조)던 드라마(달은 해가 꾸는 꿈,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건 감독은 세상은 착한 사람이 살아가기엔 너무 부조리 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의 영화에선 늘 착한 주인공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접한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착하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종국엔 슬픈 결말과 만난다. 슬픈 운명을 지닌 그들은 상황은 뒤집어 버리고 싶지만 그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기엔 상황 이 너무 힘겹다. 어떻게 주변에서 도와주면 될 것도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게끔 하지만, 결국 그들은 안타까운 결말을 맞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슬프고 안타깝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들이 아무리 선한 의도로 일을 시작하였던 간에 그 사건 때문에 주인공들은 막다른 길로 향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듯 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상의 부조리의 끝은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세상은 정말 착한 사람이 살기엔 부조하기만 한 세상 일까 ?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속의 그들의 모습은 기존의 영화들의 주인공들 보다 한층 더 건조하고 비극적이다. 그의 영화 속의 상황의 주인공들은 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그 상황을 어찌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였지만 적어도 주인공들 중 누군가는 희상을 주는 인물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뭔가 상황을 개선해 보려는 의지가 있었다. 안간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절망이다. 그들이 질주해 가는 파국의 길에 는 그들을 도와주는 누구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느끼는 복수심 그것뿐이다. 그들에겐 서로에 대한 이해심은 전혀 없다. 비록 그들이 착한 사람이라도 복수의 대상일 뿐 서로에 대한 연민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안타깝다 못해 비명을 지르고 싶다. “그만들하라고…”
영화가 주는 상징. 부분으로 모든걸 판단하는 세상 영화의 초반 라디오 DJ가 말하지 못하는 류를 대신해 누나에게 전하는 사연을 읽고 있다. 사연에 감독 받은 DJ는 자신이 받은 감동을 고스란히 청취자들에게 전해 주려는 듯 슬픔에 젖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연을 읽는다. 그 사연을 듣고 있던 누나는 동생의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 류의 유괴사실을 안 DJ의 행동은 돌변한다. “유괴범이 었어요, 그럼 선물주지 말아야겠다” 하고. 요즘 사람들은 한가지 사실로만 상대방을 판단하는 경향을 가진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사람을 이해하는 것 보단 판단하는 것이 더 빠르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메시지가 판단을 흐릴 때가 많은 세상은 어떻게 보면 편협 된 세상이다. 이런 편협 된 세상에 대한 감독의 비꼬기는 고통 때문에 방바닥을 뒹구는 누나의 비명 소리를 남녀가 사랑행위로 인해 환희의 기쁨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는 소리로 판단착오(?)를 일으킨 옆방 청년들이 하는 자위행위를 통해서 또 한번 우회적으로 비추어 진다.
세상은 그들의 처한 처해진 상황을 들여다 보고 관찰하기보다는 그로 인해 드러난 모습만이 소리만이 중요하다. 그들은 그것으로 그들을 판단하며 그것으로 그들을 심판하곤 한다.
모르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다. 누나가 신부전증의 고통으로 방바닥을 뒹굴고 있다. 듣지 못하는 동생은 누나가 아파서 뒹구는 줄도 모르고 한편에 서서 천연덕스럽게 라면을 먹고 있다. 꼬마가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가고 있다. 그녀는 살려달라고 오빠를 외치지만 소녀는 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듣지 못하는 것은 말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주변을 도와주지 못 할 때 죄로 돌아올 수도 있다. 아파하는 누나에게 약조차 건네지 못하는 그의 상황은 유괴된 아이가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복선을 준 듯싶다. 그렇다. 이 영화의 주인공 “류”는 죄인이다. 듣지 못하는 말하지 못하는 죄인이다.
계속되는 물에 대한 상징. 영화 속에서 물의 이미지는 아마도 비극을 상징하는 듯 하다. 영화의 초반 누나를 퇴원시키라고 말하는 의사, 병원에 있는 창문으로 비가 내리치고 있다. 슬픈 류의 상황을 하늘도 같이 울어주는 듯. 반면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병원의 창문 뒤로는 맑게 게인 배경이 비친다. 그들에게도 희망이 보이는 것일까 ? 물의 비극이 시작되는 곳은 누나의 죽음. 욕실에서 그녀는 자살한다. 그녀는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조용히 누워서 있다. 누나와 류의 추억의 장소 물가. 누나는 자신이 죽으면 그곳에 묻어 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물가는 유괴한 꼬마가 익사되는 장소이며 또한 류가 동진에게 살해 당하는 장소 이다. 영화 속에서 물의 이미지는 죽음의 이미지와 상통된다. 물을 통해서 비추어지는 동진의 모습도 비장하다. 마치 죽일 준비를 하려는 듯. 또한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물속에 잠긴 듯한 음향효과.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의 상황을 표현 할 때 사용되는 이 효과음은 그가 물속에 가라앉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맡는 인물들이 물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나 그가 물가에서 최후를 맞을 것이라는 복선 구실을 톡톡히 한다. 음향 효과 하나만으로 그는 충분히 안타깝고 비극적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나의 생각. 영화는 ‘하드 보일드 무비’를 표방한다. ‘하드 보일드 무비’란 리얼리즘과 건조함의 영화를 말한다 한다. 박찬욱 감독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그것으로 인해 극으로 치달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이다. 따라서 영화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무언가 메말라 보이고 그 메마름 때문에 건조함이 느껴 진다. 웃음기가 가신 건조해 보이는 주인공 들의 얼굴, 꼬여만 가는 상황 그리고 결말… 감독은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절망감을 심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한 사람의 자비만 있었더라면 그 사람의 포용만 있었더라면 그렇게 까지 될 것 같지 않았는데 감독은 주인공 모두에게 비극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 같다. 딸을 잃고 복수를 하는 그 사람에게도 비극적 결말을 주는 걸 보면.. 하지만 이런 비극적 줄거리의 흐름들은 이럴 수 밖에 없었다는 느낌보다는 비극적으로 극을 연출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관객에게 안타까움이나 공감을 주기보다는 짜증을 주는 느낌이다. 꼭 그렇게 연출을 해야만 했을까 하는…
솔직이 말하면 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짜증이 났다. 전체적 내용이 불만스러웠고 영화 속 캐릭터 들이 못마땅했다. 전반부에서 보여준 비극적인 류의 상황과 누나의 죽음 그리고 류의 처절한 복수까지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줄거리이다. 내가 못마땅한 건 동진의 복수극과 극중 영미의 역할. 류의 곁에 있는 유일한 사랑이자 친구 영미. 그녀는 무정부주의자이다. 웬일인지 사회와 화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는 어려움에 빠진 류에게 ‘착한 유괴’라는 범법행위 를 부추긴다. 전체적인 설정상 ‘유괴’라는 고육지책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행위처럼 보여지기는 하지만 어쩐지 그녀의 행동은 류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단순히 트러블 메이커라는 느낌만 들 뿐이다.
보배를 납치당한 가장 동진. 그는 부유하지 않다. 자수성가로 이루어놓은 사업도 실패하고 경제적인 능력을 상실한 그에겐 아내조차 떠나고 없다. 그에게 남은 건 어린 딸 뿐이다.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슬픔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딸이 살아가는 의미이고 희망 이었던 그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그가 딸의 죽음 뒤에 하는 행동은 평범한 아버지의 일반 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는 설정이다. 그는 형사보다도 먼저 범인이 살던 집을 찾고 누나의 시신을 찾는다. 형사보다 먼저 영미의 존재를 알아내곤 그녀를 고문 끝에 살해한다. 영미를 죽인 후 동진을 류를 쫓고 영미의 죽음에 분노한 류는 동진을 쫓는다.
비극으로 치닫는 마지막. 동진은 류의 상황을 모두 알아버린다. 그가 왜 돈이 필요했는지 왜 아이를 납치했는지.. 하지만 동진은 그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미안하지만 이해해 주라 라는 식으로… 하지만 꼭 동진이 류에게 그렇게 까지 복수를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이기까지 할 정도로… 감독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런 장면에 직면하는 부분에서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상대방을 용서해주는 정형을 파기하고 죄에 대한 처벌을 감행하는 방법을 비정함을 택한다. 주인공의 비정한 행동을 통해 그가 느꼈을 법한 절망감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전체적인 상황이 동진의 행위에 공감을 주기 보다는 죽어가는 류의 모습이 오히려 안타깝다. 영미가 왜 동진의 손에 죽음까지 당해야 하는지, 동진은 어떻게 사람을 죽이면서도 저렇게 무표정할 수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세 사람의 죽고 죽이는 운명의 고리는 너무 복잡하게 얽혀서 풀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세 사람에게 걸쳐있는 운명의 고리 때문에 줄거리는 산만해져 감을 느 낀다.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는 그들이 그렇게 될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기 보다는 감독의 의도된 연출에 의한 파국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그들의 파국을 보는 관객들이 받는 느낌은 시종 절망적이다. 영화에 공감하고 감동을 받아야 할 관객 에게 절망감을 심어준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관객의 눈까지도 절망적으로 바꿔버릴 것처럼 보인다.
꼭 감독은 그렇게 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을 꼭 그렇게 만들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난 세상은 살만하다고, 좋은 사람이 더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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