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라는 차이밍량의 영화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이 세 인물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전개한 영화이다. 세 인물을 제시할 때, 아들, 아버지, 어머니 순서로 등장시키되 일반적인 헐리우드 영화마냥 이 인물들의 캐릭터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방식으로 이들은 등장한다. 이들의 성격, 학벌, 직업, 과거의 기억 등등 캐릭터 디자인에 대한 설정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이들의 캐릭터는 불분명하게 제시된다. 그저 툭 공간에 툭 이들이 존재하는 식이다. 인물들의 캐릭터에 대한 소개가 부족하니, 영화 초반에는 이들의 일상과 행동에 대한 이해가 약할 수밖에 없고, 설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욕망과 목표가 무엇이고, 무엇이 이들의 욕망을 방해하며, 이들은 어떻게 해서 방해를 극복하고 목표를 이루어내는지 식의 일반화된 내러티브를 따라가긴 한다. 헐리우드 영화처럼 분명하게 제시되진 않지만, 영화초반 세 인물의 등장은 이들의 욕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저 사우나에 누워있는 아저씨, 이 사람이 아들의 아버지라는 이해가 성립되는 건 그가 가정으로 돌아와 아들과 부인을 마주칠 때이다. 이전까지 밖에서의 그는 중년의 한 남자이다. 가정 안에서의 이들과 가정 밖에서 이들에 대해 차차 생각해보기로 하자. 다시 돌아와 어둠침침한 사우나에 누워 있는 남자의 몸을 남자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다른 사내가 애무를 한다. 그러나 남자는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샤워를 한다. 이 남자는 동성애자 같긴 한데, 거부를 하는 걸로 봐서는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남자가 동성애자임이 분명해진다. 아들은 우연히 2년 만에 만난 여자를 영화촬영 현장에 데려다주다가 촬영장의 감독의 제의로 물 속에서 죽어있는 시체 역할을 해낸다. 이 아들 또한 가정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마주치며 이런 혈연의 관계가 성립된다. 여자가 안내한 모텔에 들어가 자신의 치아를 닦던 칫솔로 몸의 곳곳을 닦는다. 냄새를 맡아보고 다시 씻는다. 아버지도 씻고, 아들도 씻는다. 여기서 이들이 왜 씻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씻는다는 행위가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후반부에 드러나지만, 아들은 사우나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돌아가고, 영화 마지막에는 사우나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근친상간의 섹스를 한다. 그는 동성애자다.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거부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자신을 애무하는 남자의 손길을 거부하고, 아들은 오랜만에 만난 여자와 섹스를 한다. 그러나 이성애자 사회에서 터부시되고, 타자가 될 수밖에 없는 동성애자의 비애와 현실이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고통을 안겨주어도, 이들의 성정체성을 억지로 바꾼다는 것은 가짜 삶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들이 촬영현장에서 인형 대신 죽어있는 시체의 역할을 하는 장면은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이성애자로 살아가려하는 그가 인형과 같은 거짓의 삶, 또는 죽어있는 시체와 같이 의미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구조 안에서 아들은 이성애자로서의 거짓 삶을 살아가는 걸 씻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동성애자로서 동성애를 거부한 자신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본연의 동성애의 성정체성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또다시 이성애를 한다. 그리고 목이 아프기 시작한다. 목이 아프다는 것은 성정체성을 숨기고 이성애자로 살아가는 동성애자의 답답한 현실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장실에서 여자는 소변을 보기 위해 불을 끄고 커튼도 쳐달라고 한다. 아들은 화장실 불을 친 채로 나오고 아버지는 그것을 끈다. 화장실과 불을 끄고 키는 문제. 화장실은 인간이 배설을 하는 공간, 욕망의 공간이다. 아들은 여자와 섹스를 하기 전 여자의 요구대로 불을 끈 것이다. 이는 자신의 동성애를 숨기고 이성애로 살아간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런 고통이 목의 아픔으로 전이되면서 다시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고자 화장실 불을 키고 나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아들의 행위를 불을 끄는 것으로 막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동성애로서의 삶을 숨기고 살 것을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타자로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자신이 사회에서도 그리고 가정에서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인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이 가정이 정상적이지 못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이야기한다. 아버지도 아들도 대를 이어 동성애자이나 이성애자로서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않길 바라고, 그것을(이성애로서의 거짓 삶)을 끝내라고 한다. 아버지는 한 젊은 남자와 동성애를 시도하나, 젊은 남자도 젊은 육체가 좋지 늙고 병든 육체가 좋을 리가 없다. 이성애자들이 젋음을 좋아하듯이, 동성애자도 외모와 나이를 고려한다. 타자화된 동성애자는 무조건 남자하고만 하면 다 만족한다는 편견을 나는 나도 모르게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에 대해 관심이 없고 몰랐기 때문이다. 가정을 갖고 나이가 든 동성애자의 현실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일반적인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은 이성애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이러한 중년층의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로서 자신을 숨기고 살아갈 것이기에, 동성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사회적으로 용납된 곳은 없고, 사우나에서 음성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나마 대부분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동성애를 억제하기에 아픔을 같이하고 사랑을 나눌 상대도 적다. 식당가 패스트 푸드점에서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과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은 왠지 그들과 동떨어져 보인다. 정서를 느끼게 하는 연출은 아니지만, 그 이미지는 그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슬프고 외롭기까지 하다. 늙은 육체로 동성애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적으며, 만족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커밍아웃하지 못한 이들은 진정한 자신의 사랑을 찾지 못하고 그저 사우나와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음성적으로 섹스 파트너를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섹스는 공허하다. 아들의 여자와의 섹스가 공허했듯이, 동성애로서의 섹스도 육욕의 만족에 불과하기에 허망하다.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 결실을 맺고 어떠한 공인된 관계를 맺지 힘들다는 현실. 아버지는 거리에서 남자친구와 팔짱도 끼고, 키스도 하며, 결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섹스는 그에게 어떠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아들의 목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것은 그러한 동성애자의 아픈 현실의 고통과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유로울 수 없는 답답함을 표현한다. 아들의 일그러진 얼굴은 그런 답답한 현실에 대한 몸부림과 저항으로 이해된다. 아들은 이러한 몸부림을 통해서 거짓 삶을 거부하고 성정체성을 찾아가려고 이 악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아들을 이성애자인 어머니는 알아보지 못한다. 이성애자로서 동성애자와 결혼한 어머니의 인생 또한 쓸쓸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채우지 못한 욕망을 위해 포르노 영화를 보고, 다른 남자와 외도를 하지만, 그것도 공허하기만 하다. 포르노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격정적인 이성애 섹스를 갈구하나, 여자에게 마음이 식은 다른 남자는 그녀를 거부한다. 욕망의 숨김과 욕망의 결핍은 이렇게 인간을 궁핍하고 처참하게 만든다. 어쨌든 동성애자인 남편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 어머니에게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아들의 모습이 눈에 보일 리가 없다. 그러한 아들을 거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병원에서 머리를 깎이고 고통스러워 할 때, 어머니는 아들을 떠나보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성애자로 살아간 아들을 돌봐주던 어머니는 이제 아들을 아버지에게 맡긴다. 영화에서 세 인물의 동선과 관계를 보면 초반 아들은 아버지의 물음에 한 마디 대답이 없고, 어머니와 친숙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병원에서의 일을 계기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병을 치료하기 여행을 떠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성애에서 본연의 동성애로 넘어가는 아니면 원래 이성애자였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은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대변하듯 아들은 이성애자를 상징하는 어머니를 떠나 동성애자인 아버지에게로 간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투숙하는 모텔 방 옆방의 여자와 남자의 섹스를 엿듣는 장면은 그의 성정체성에 대해 나를 혼란케 한다. 그는 이성애자였단 말인가? 나의 판단과 추측은 무너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사우나 앞에서 망설이고 아버지와 같은 남자와 섹스를 하는가? 가 설득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의미부여한 장면들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들이 사우나 입구까지 들어갔다가 나오고 방금 아버지와 섹스를 한 젊은 남자와 마주치고, 젊은 남자가 지나치는 아들을 물을 마시며 바라보고, 다리 위에서 둘이 걷는 장면은 아들이 동성애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여기서 아들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에서 동성애로 넘어가는 단계인지, 모호해진다. 그래서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앞의 이야기를 엎어야만 한다. 다시 생각해보길, 아들은 이성애자인 어머니와 동성애자인 아버지의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둘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한다고 볼 수 있다.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라는 식으로 이분법으로 나누기보다는 이 아들에게는 두 가지 성정체성이 내재해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양성애자라고 규정짓는 것은 아니다. 우리네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나의 성정체성이 과연 무엇인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는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성정체성의 불명확성에 대한 문제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보이지 않았던 동성애를 발견했을 때의 기분과 충격은 이성애가 주를 이루는 사회에서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동성애의 고통이다. 이러한 일이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감독은 이성애자, 동성애자의 구분을 거부한다. 그것은 언젠가 바뀔 수도 있는 문제이고,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불필요하고 있지 않아도 될 편견과 고통을 안겨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표현이 아들이다. 이성애와 동성애로 구분되고 서로 으르렁거리던 아버지, 어머니 세대를 넘어서 그것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러 아들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겉모습이 비슷하지만 인형보다도 사람이 죽어 있는 시체로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영화에서처럼, 껍데기 불과한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 안의 진실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하는 모습 말이다. 아들은 공허하기만 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현실, 이들의 외면하는 관계, 온기 없는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성정체성과 섹스가 아니라 그것들을 아우르고 통합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로 보여진다. 아버지와 아들의 근친상간 섹스는 아들이 성정체성을 넘어서 사랑이라는 넓은 공간으로 아버지를 안내한다. 성정체성과 근친상간이라는 사회적, 관습적 굴레를 벗어난 것이다. 아들은 목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자신을 다시 돌아본 듯 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 결코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하지 못하는 세 인물. 서로 대화가 없는 가족. 사랑이라고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는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결혼, 그 밑에 태어난 아들. 그것이 낳은 불행. 성정체성의 구분과 육욕의 섹스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아버지, 어머니를 바라보며, 아들은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동성간의 섹스에서도 이성간의 섹스에서도 아버지, 어머니는 행복하지 못했다. 각자의 욕구에 따라 가정의 파탄도 감행하고 각방을 썼지만 거기에도 정답은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에게는 자신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그런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보지 못한 혈육의 정과 사랑,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성애자들이 음습하게 섹스를 하고 공허를 느끼는 사우나에서 서로 애무를 해주고 하는 모습은 애처롭다. 닫혀있던 그들 간의 소통은 이렇게 애처롭게 소통하는 것이다. 근친상간과 동성애라는 사회적 규율과 비난을 감내하면서까지 말이다. 아버지는 자신과 섹스를 한 상대가 아들임을 보고 아들을 뺨을 때린다. 아직 아버지는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에 갇혀 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과 함께 침대에 눕는 장면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살갑게 느낀다. 근친상간을 했다는 죄의식보다도 그의 눈물은 막혀있던 자신의 삶에서 한 가지 빛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다. 아버지에게 어떤 사찰로부터 아들에게 신?(어떤 정신)이 내렸다는 전화가 온다. 아들의 목이 낫기 시작한다는 징조다. 아들의 목은 성정체성의 구분이 가져다주는 편견과 압박, 굴레.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가정의 불행 등 이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 고통이 해소되면서 아들의 목도 낫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 방의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물. 이것은 동성애자로서 아버지의 풀리지 않는 현실의 답답함과 고통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천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윗집으로 가나 윗집의 문을 두드리나 대답이 없고, 할 수 없이 수리공을 불러 천장의 새는 물이 화분으로 흐르도록 하는 임시방편을 한다. 근본적인 해결을 찾지 못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치료를 떠나고 없는 사이, 외도의 상대인 남자와 공허한 섹스를 하고나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골칫거리인 천장의 물이 다시 새는 걸 보고 윗 층으로 기어 올라가 흐르고 있는 수도꼭지의 물을 잠근다. 이러한 어머니의 행위는 그토록 믿었던 이성애의 섹스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하자, 아버지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와 소통하고 싶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어머니가 아버지의 골칫거리를 해결한 장면은 아버지가 아들과의 섹스를 통해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깨닫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 근본적인 해결의 키를 아들이 키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직접적이지는 않으나 아버지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도와준다. 여기서 두 인물이 아버지를 도와준다는 설정은 동성애자가 사회적으로 소수자이고 이성애자에 비해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성애자가 먼저 손을 뻗어 이들과 인생을 공유하길 시도해야 한다고 하는 감독의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풀리지 않는 가정의 문제를 벗어나면 무언가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밖의 사회적 공간으로 헤매는 이들은 사우나에서 동성애를 하고, 외간 남자와 외도를 하고, 오랜만에 만난 여자와 섹스를 하는 등 겉돌지만, 결국 가정이라는 관계에서 사랑을 느끼고 안식을 찾는다. 감독은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과 함께 깊은 애정이 있는 듯 하다. 영화상에서 초반에 가족은 매우 건조하고 의미 없어 보이지만, 점점 그 의미를 획득해나간다. 아들은 여자와 섹스를 하기 전 모텔에서도 집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투숙한 모텔에서도 창밖을 바라본다. 하얀 빛이 쏟아지는 바깥. 그러나 아들은 영화의 마지막이 오기 전까지 창밖을 바라만 볼 뿐 나가진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의 마지막, 그동안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에게서 헌신과 부정을 느끼고,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천정의 물이 새게 한 수도꼭지를 틀어막은 어머니처럼 말이다. 이들은 이제 모든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굴레에 갇혀 자신들의 행복을 찾지 못하고 불행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감독은 게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커밍아웃을 했다고 들었다. 그가 동성애자로서 살아가면서 가족 안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의 문제도 그에겐 고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밝힘으로써,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힘들게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이 행복을 찾는 열쇠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이 영화를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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