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맛깔스럽고 싱싱한 재료가 준비된 요리집이라도 요리사의 사소한 실수나 그의 재주가 모자르다면, 그 음식의 결과는 미식가들의 미간을 찌프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텔레비젼속에서 수많은 잔인한 살인과 폭력이 즐비하더라도 "영화"라는 여과기 속을 거친다면 새로운 옷을 입고 탄생하게 되어 그 심각한 살인도 정당하고 당위성 있는 매력으로 관객의 고개를 끄떡이게 하는 법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빼고, 거친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며 폭력적 테마나 사건을 전달하는 문화장르'라는 하드보일드무비라는 수식어로 관객을 유혹했던 '복수의 나의 것'은 그 뚜껑을 열어보니 다만 감독의 화려한 미식어로 포장된 어처구니 없는 선물이었다.
아마도 감독은 이영화를 통해 사소하지만 강렬한 상징적 장면과 어쩌면 사회의 외면을 받을 수 있는 잔인한 사건을 여과없이 관객의 뇌속에 주입시켜 그 지독한 심장의 두근거림을 강렬한 충격으로 소화시켜 관객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영화는 시종내내 길을 잃고 헤매는 자처럼 관객의 의문서린 눈동자만의 깜박거림을 가져올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인생의 전부였던 딸아이의 유괴, 순수하고 착하지만 누이의 수술비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괴했던 아이의 우연한 죽음을 으로 아버지의 복수심에 쫓겨야하는 청각 시각장애자, 사회의 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설픈 혁명가..
우습게도 감독은 유괴범과 희생자인 아버지를 동일시 시킨다. 어찌보면 사회악은 유괴범이겠지만 그를 잔인한 유괴범으로 이끈것은 바로 희생자인 아버지와 같은 배부른 돼지들이란 것이 감독의 주장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감독의 메세지는 엉뚱하게 전개되는 시나리오속에서 갈길을 잃어버리고 불필요하고 공감되지 않는 상징적 장면들은 도리어 관객의 고개를 갸윳거리게 하며 결국은 어이없는 아버지의 대사 한마디로 그 엉성한 구성을 마무리함으로서 관객의 가벼운 야유를 감독은 짊어지는 축복(?)을 받게 된다.
마치 까뮈의 "이방인"처럼 주인공이 햇빛의 눈부심때문에 살인을 했다고 고백하지만 그 어이없는 대답속에서도 독자는 심오한 공감대를 형성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송강호의 마지막대사인 "너는 착하지만 이해하지"라는 그런식의 어설픈 모방으로 충분히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을거라는 어처구니 없는 기대를 감독은 한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 여기서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화려하다. 어둡고 음울하지만 천진한 소년같은 마음으로 두려움과 괴로움을 표현한 시각 청각 장애자인 신하균이나, 갸웃거리는 반항심과 호기심으로 살짝 악의 구렁텅이를 기웃거리는 배두나의 연기는 관객의 충분한 호감을 산다.
하지만 감독의 무리한 욕심은 영화속에 무심코 스며들어 도리어 배우의 멋진 연기를 퇴색시키고 지나치게 기름끼를 뺀 하드보일드 무비는 무절제한 상징과 어줍잖은 전개로 관객의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