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3대 여류작가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섬세하고 여성적인 성향의 문체가 특징적인 그녀의 성향을 빼닳은
그녀의 소설중 <아르헨티나 할머니> 가 영화화 되어 국내에 선을
보였다. 원작소설을 빼놓더라고 하더라도 이 영화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선을 가지고 있어서 좋다. 판타지적인 느낌에 다소 현실적인
느낌과 동떨어진 약간은 비현실적인 느낌의 경계에 서 있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직선적으로 표출하는 방식보다 좀 더 완만하고 여운을 즐길
수 있는 곡선적으로 느리게 돌아가는 느낌을 나는 선호한다. 영화의
분위기를 한 층 더 깊게 느낄수 있는 탱고선율인 악기 반도네온의
연주자인 코마츠 료마를 비롯한 원작 일러스트레이터 요시모토 나라
의 참여로 한층 기대감을 끌어올린 영화는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소문
을 이야기하는 부문에서 시작된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동화의 마녀의 이미지처럼 아르헨티나 유적이라 불리어지는 낡은
빌딩에서 아침마다 탱고를 추며 고양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기묘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안게
만들게 된다. 그 와중에 미츠코(호리키타 마키)의 자기 소개와
자신의 사촌, 그리고 석공인 아버지 사토루(야쿠쇼 코지), 전직
수영선수에 가장 건강했지만 병환중인 어머니의 모습... 그것은
미츠코의 18살 되던해 일어난다. 언제나 어머니의 병문안을 가던
사토루는 미츠코와 함께 가는 것을 거부했고, 미츠코의 앞에서
코피를 쏟으며 거품을 묻은채 쓸쓸하고 힘없이 목숨의 끈을 놓아
버리는 어머니의 모습앞에 미츠코는 충격을 받는다. 사토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혼자 남아 우연한 계기로 들린 마사지 시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모와 사촌에게 기대가며 생활하는 미츠코의 모습
이 그려진다.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마을 사람
에게 아버지의 차량이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낡은 건물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 상황, 미츠코는 연락을 받자마자 찾아가게 되고, 어릴적
소문의 두려움을 떨치고 낡은 문을 두들긴다. 그리고 괴팍한 인상의
머리를 늘어트린 아르헨티나 할머니(스즈키 쿄카)의 등장, 그녀는
심각한 냄새를 풍기며 미츠코의 괴로움에 아랑곳 하지 않고 반겨주다
그녀를 기절 시키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를 찾아 옥상에 올라
간 그녀는 무언가 열심히 조각중인 아버지의 뒷모습을 마주한다. 그리고
사토루에게서 '만다라' 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우주는, 평면이 아니고,
시간도 없어. 그리고 무수한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겹겹의 층 안에
시간과 온갖 것이 다 들어 있고, 전부 이어져 있어. 마치 요술 상자처럼 말이야.
이건 어떤 이치로도 설명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어. 어떤 부분이든
모든 부분과 통하게 돼있어. 깊숙한 공간이 한없이, 하염없이 겹쳐 있는 거야.
그리고, 그걸 어떻게든 나타내 보려고 한 것이 만다라가 아닐까. ”
라는 해괴한 논리를 설법하는 사토루의 이야기, 그가 불교인이었다는 것을
볼때 미루어 짐작할수 있는 일명 '우주의 진리' 라는 것이다. 상세히
들여다보면 사토루는 아내의 상실감을 인정할수 없어 도망치고 미츠코의
아버지로서의 권리도 내팽개친 나약한 인간이 된다. 그 구심점인 '대일여래'를
아르헨티나 할머니인 '유리' 를 둠으로써 그 나약한 생활에서 찾을수 있었던
벌꿀 짜는 법을 배울때의 즐거움, 탱고를 배울때의 열정과 기쁨, 사랑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답일 것이다.
무책임한 아버지의 태도와 계속 그곳에 머무르는 것에 대책을 강구하는
미츠코와 그녀의 고모, 마을 사람들의 의견에 계속되는 계획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좌절되며 미츠코는 목까지 기부스하는 상황에 처한다.
마침내 유리의 임신 사실이 병원에서 확인된 순간 유리의 이야기에 사토루는
비로소 제 정신을 되찾는다. 도망가는 것으로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것을
사토루에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면서도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의지를 보여줌
으로써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 속에서 사토루는 그 간 도망치던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의 묘비를 완성시킨다. 그리고 병원에서 행방을 감추었던 미츠코
를 찾아내 함께 묘비를 확인하며 갈등이 해소되는 순간 그 속에 웃음이 피어난다.
유리는 자신의 가족이 군인들에게 사살된 참혹한 사건을 인정할수 없어서
거기서 도망쳤지만 그녀는 그것을 이겨내고 탱고를 추는 것과 벌꿀을 따는 것등을
통해 삶을 정열적이고 때론 느슨하지만 격렬하게 움직이는 생동하는 삶으로의
복귀에 성공했다.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도망친채 거의 산송장의
상태로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낡은 빌딩으로 흘러들어온 사토루는 똑같은 치유의
시간과 가족, 유리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미츠코와 사토루를 이어주는 결정적인 매개체가 되었던 유리가 새 생명의 출산을
앞두고 유리와의 진지한 이해와 포용의 시간을 갖는다. 유리와 미츠코가 탱고를
추는 장면직전에 유리가 미츠코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지 아냐?' 고 묻자 '자기의 역사를 남기고 싶어서...' 라고 미츠코가
대답을 하죠. 그러자 유리가 대답합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이 순간의
영원함을 붙잡아 두고 싶은 바램이 들어있기때문이라고...(간략화)' 라고
대답을 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진이나, 동영상또한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인간의 바램이 만들어낸 산물의 결정체, 즉 사람이 사랑을
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 만들어낸 물건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유리와 미츠코의 탱고, 이것은 유리의 정열과 생의 에네르기가 미츠코에게 전달되어
앞으로 그녀의 꿈에 날개를 달아줄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마지막에 비로소 전달되어
진 행복 바이러스의 의미를 깨달아 버린 것 같습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감정이 솔직하고 좋을수도 있지만 같은 언어라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오히려
그 과격함에 질식해 버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돌려서 이야기
했을때 가슴안에 잔잔하게 들어오는 사랑의 감정, 생의 에네르기, 감동같은 것이
좀 더 많이 전해질수 있는 영화가 많이 개봉했으면 하는 바램과 즐거운 여운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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