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실과 날실이 촘촘이 엮인다. 오랜시간 그 과정이 반복되고 나서야 비로소 예쁜 비단 한 폭이 나온다. 얼핏 단순한 작업인 것 같지만 매순간 실의 가닥가닥을 촉감해내야 하며 색의 조화를, 완성된 전체의 모습을 끊임없이 연상해내야 한다. 직접 해보진 않았지만 분명 어렵고 지루한 과정일 터다.
쉬 탈색되는 기계직물과 합성소재에 익숙한 내게, 그리 단순하게만 살아온 내게 '색계'의 촘촘한 엮임은 굉장히 낯설다. 색과 계를 넘나드는 감정과 이성, 욕망과 절제의 순간들, 씨실과 날실의 무수한 교차를, 나는 보았으되 촉감하지는 못했다. 무명 저고리 같던 '왕차이즈'가 치명적 매력을 가진 비단으로 변신할 때부터 나는 결코 영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동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을 보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기만 했다. 이안의 거침없는, 때로는 조심스런 붓질 보다는, 혹은 그가 그려낸 아름다운 한 폭의 동양화보다는 그가 쓰는 붓이 미국제라는 사실이, 그의 고객이 눈 푸른 서양인이라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쯤되면 씨실과 날실이 어떻게 엮이는지, 그 모양이 어떠한지는 내게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명민함이 감탄스럽기도 하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며 CG로 떡칠을 한 괴수 모조품 영화를 들고 헐리웃으로 날아간 한 감독의 모습이, 우리네 감성에는 충실하되 결코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충무로의 현실이 떠올라서다. 이안. 그가 헐리웃과 중국을 넘나들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이유, 그의 영화가 유명 영화제를 휩쓸고 세계 각지의 극장을 장악할 수 있는 이유. 그건 그리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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