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몇 가지 특징:
1) '숨막히는 20분'은 다 합쳐서 20분이다.
2) 그리고 그 20분은, 사람잡는 20분이다. 배우와 관객 모두 다.
3) 이 영화의 '원톱'은 양조위가 아니라 탕웨이다.
4) 전쟁씬 하나 없이도 전쟁의 폭력성을 끔찍하게 묘사한다.
사실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첫 계기는 '숨막히는 20분'이라는 카피였다. '무삭제'라는 미끼에 퍼덕퍼덕 낚인 뒤, 인터넷에 쏟아지는 영화평과 기사와 스틸컷, 예고편 등을 유심히 보면서 점점 이 영화에 마음이 끌렸다. 그중에서도 끓인 우유 더께처럼 뇌리에 붙은 이미지는 '이완 감독이 발굴한 신예'라는, 탕웨이라는 여배우의 얼굴이었다. 풋풋하면서도 제대로 사람 잡게 생긴 팜므파탈의 섬뜩한 얼굴. 요즘 드라마 제목처럼 '그 여자가 무서워'였다.
결국, 토요일 아침잠을 희생하며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순진한 여대생 왕치아즈는 엉겁결에 항일결사조직에 연루된 뒤, 미인계를 이용하여 친일파 장군 이(이름은 나오지 않는, 그저 이아무개)의 암살을 꾀하는 계략의 선봉에 선다. 미인계(美人計)는 어느새 색계(色計)가 되고, 욕망과 경계가 위험하게 흔들리다가 파멸하고 마는 이야기. 어떤 이는 이 작품을 '불편한 시선의 사랑영화'라 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사랑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솔직히 인정은 한다. 그 '숨막히는 20분'을 내심 기다렸다는 걸. 그러나 보면 볼수록, 심지어 그 '20분'마저, 이 영화의 모든 줄거리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약육강식의 논리로 집중되는 것만 같았다. '막 부인'으로 가장한 치아즈는 '이'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 술과 담배를 배우고, 유부녀 신분을 입증하고 색계를 쓰기 위해 스스로 처녀성을 버리고 섹스테크닉까지 연마하면서 순진무구하던 자신을 구겨버린다. 그녀는 색으로 '이'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 하지만, 평생 불신과 경계를 방패삼아 살아온 '이'는 먼저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만다. 어설프게나마 유혹을 시도하는 치아즈를 침대에 쓰러뜨리고 뒤에서 거칠게 공격하는 이의 행위는, '폭력' 말고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그 뒤로 두 번쯤 나오는 섹스신도 거의 전투 수준으로 묘사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팽팽한 긴장을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거칠게'도 모자라 '폭력적으로' 치아즈에게 집착하는 이의 몸부림이 그렇고, 삽입당한 채 꽉 구겨진 치아즈의 몸이 그렇고, 탐닉인지 탐색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시퍼렇게 뜬 두 사람의 눈이 그렇다. 상대에게 빠져들수록 빠져들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상대를 장악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가히 '사람 잡는 20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치아즈가 베개로 이의 눈을 단단하게 가리는 장면이었다. 그전에 이가 치아즈에게 '극장이 싫다, 난 어둠을 싫어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치아즈의 몸 아래에서 눈이 가려진 이는 미친 듯 비명 섞인 신음을 토하다 결국 베개를 뿌리치고 다시 여자의 위에 올라탄다. 눈이 감기는(그리하여 아무것도 경계할 수 없는) 순간이 곧 위험과 죽음이었던 그에게, 눈이 가려졌던 그 몇 초는 극상의 쾌락이면서 그렇기에 더없이 위험한 때였으리라.
어쨌든 목표물과 '깊은 사이'가 된 '막 부인'은 배후조직에서 더 많은 역할을 요구받는다. 연기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얼굴마담으로 끝간데없이 내몬 조직의 처사 또한 폭력이라 볼 수 있다. 치아즈 개인의 안위와 소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하나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육정'에 이끌려 '색'과 '계' 사이에서 점점 헷갈리게 된 이 아가씨는 막판에 헛다리를 짚고 만다. 그 첫째 이유는 그녀가 '계'를 완성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진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 어설픈 '계' 때문에 상대방의 진심(이라고 추측되는 행위)을 오해하고 저버렸기 때문이리라. 그 결과는 스포일러 없는 다른 영화평에서 암시하는 대로, '파멸'이다.
들꽃 같은 시골처녀 치아즈를 색녀로, 급기야 파멸로 몰고 간 줄거리도 폭력적이지만, 그 폭력성을 가장 끔찍하게 웅변한 건 이의 눈빛이었다. 폭력이 가장 폭력적인 상황은 '폭력'이 '배려'의 탈을 쓰고 나타날 때인데, 영화 속 이의 말과 표정이 바로 그랬다. 간간이 나오는 애정표현이 진심인지 계략인지 알 수 없는. 영화가 개봉할 즈음 배우 양조위에 대한 글들 가운데 그의 '눈빛'연기가 절대지존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영화 속 양조위를 보니 그 내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을 만큼 완고한, 그러면서도 아주 작은 틈을 내보이며 순진한 아가씨의 영혼을 흔들어놓는 계략가. 그가 타고난 악마인지, 아니면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불쌍한 영혼인지, 치아즈의 파멸을 대하는 그의 눈빛이 '연민'인지, 아니면 잠시 좋았는데 아쉽다는 '악어의 눈물'인지,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정신적 충격으로 앓아눕고 싶어졌다. 영화 전반을 장악한 폭력적 분위기가 너무 징그럽고 끔찍해서. 쏘고 찌르고 폭발시키는 직설적 전투장면 하나 없이도, 감독은 시대적 배경 설정과 남녀 주인공의 관계 묘사만으로도 약육강식 세상의 투쟁을 징그럽고 끔찍하게 은유해 냈다. 물론 팽팽한 심리적 긴장감과 치명적 균열을 집요하고 섬세하게 묘사해 낸 두 주연배우의 연기력이 아니었다면 이같은 묘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색, 계>라는 영화에서 내가 받은 것은 감동도 카타르시스도 아니었다. 오로지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