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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의 영화리뷰(1) 트레이닝 데이 - 신고식이 악몽이 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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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톡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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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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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10 오후 5:50: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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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의 영화리뷰 (1)
트레이닝 데이 - 신고식이 악몽이 될 때.
새벽, 어느 뉴욕의 주차장, 공포에 질린 금발여자, 그리고 그녀를 뒤쫓는 흑인 깡패들, 웃음과 비명이 가득한 주차장 뒷골목에서 한 놈이 뒤를 돌아볼 때면 회색 바바리 코트에 은빛 권총을 들고 말없이 서 있던 사나이, 희로애락의 구별이 상당히 어려운(원래 얼굴이 좀 그렇다..) 찰슨 브론슨의 두툼한 입술에 엷은 미소가 비칠 때 영화 속 범죄자들은 지구 버스에서 하차할 시간을 예감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실제 상황에선 징역 200년을 살아도 모자란 폴 컬시의 '자경단'(vigilante)적인 폭력행위가 영화 '데드위시'에서는 나름대로의 상당한 정당성을 지닌 보복논리로 통용되곤 했다. 하긴 아내와 딸을 범죄로 잃었다는 남자에게 준법정신을 말하는 건 웃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법 집행의 미래뿐 아니라 현재도 잘 아는 소시민에게 영화 한편이 선사하는 두 시간 남짓의 행복한 복수는 그저 상쾌한 액션영화의 소재였을 뿐이였다. 그런데 그리도 속시원하던 '범죄는 내손으로'라는 솔선수범형 범죄 척결논리가 '트레이닝 데이'에선 골치 아픈 악몽으로 전락하게 된다. 치안의 무력함을 스스로 해결하는 오락영화의 느슨한 동기가 트레이닝 데이가 표방하는 진지한 리얼리티의 톤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범죄를 척결하는 무법 논리가 껄끄러운 이유는 다름 아닌 설치는 장본인이 바로 형사이기 때문이다.
데드위시에선 폴 컬시를 위협하고 때론 유화하던 형사란 직업이, 이번에는 범죄를 척결하기 위해선 살인과 심지어 부패도 부패가 아니라고 떼를 쓰는 극단적 주장의 장본인으로 돌변한다. LA마약반에 지원한 신참 제이크(에단 호크)는 13년 경력의 베테랑 형사 알론조(덴젤 워싱턴)의 파트너가 된다. 정의감 강한 제이크에 기대와는 달린 고참 알론조는 성폭행범의 주머니에서 대마초를 빼앗아 신참인 그에게 피울 것을 강요하고 심지어 가짜 영장으로 용의자의 집에서 돈을 훔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제이크는 범죄를 없애려면 양을 지키는 늑대가 되야 한다는 알론조의 말에 반신반의하지만 마약대금을 빼돌리며 친구를 살해한 사건을 조작하는 그를 보고 가치관의 혼란과 더불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리고 만다.
할리우드 스릴러 장르의 옷을 입고도 나름대로의 진지한 톤이 일관되는 트레이닝 데이에서 덴젤 워싱턴의 주장은 장르영화의 농담으로 넘기기엔 지나치게 리얼하며 때로는 당혹스럽게도 매혹적이다. '양을 늑대에게서 지키려면 똑같이 늑대가 되야 한다'는 이른바 '양 지키기용 늑대 옹호논리'를 말하며 늑대 울음소리까지 어설프게 흉내내는 순간 가치관의 혼란은 절정에 다다른다. 하루 동안의 일대기를 영화화한다는 점에서 꼭 하이눈을 연상시키는 트레이닝 데이에선 불행히도 기차시간에 맞춰 나타나는 '악당'이나 마을 사람들의 '무심함'이 적이 아니라 바로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가치관의 판단 문제만을 중심에 두게 된다.
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 중 하나는 덴젤 워싱턴의 악역 캐릭터 변신이다. 부패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듯 보이는(?) 형사의 모습에서 그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정의로운 인텔리의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전반부에 덴젤의 카리스마적 연기 하나만으로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를 지니게 한다. 연기의 신고식에 걸맞는 에단 호크의 호연 역시 눈에 띈다.
아쉬운 점 - 편견을 지적하는 또 하나의 편견
가치관의 혼돈과 파시즘을 언급하는 영화 치곤 전반부에 걸쳐 트레이닝 데이에서 묘사되는 슬럼가는 지나치리만큼 폭력적이다. 과연 이 영화를 본 사람 중 몇 사람이 제정신으로 미국 거리를 걸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트레이닝 데이는 범죄와 슬럼가에 대해서 철저한 정형화를 선택했다. 뒷골목의 깡패들은 단지 이웃 주민 여자의 말만 듣고 형사와 총질을 해대고 경찰이 떴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전쟁 때 쓰는 전서구, 일명 비둘기 통신까지 이용해 댄다. 심지어 형사와 결탁한 악당들은 그의 동료 형사를 거침없이 죽이려 하다가 단지 자신의 여동생을 도와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살려주며 의리를 생색낸다. 트레이닝 데이는 슬럼가를 완벽한 악의 제국, 범죄의 소굴로 묘사하다. 더욱이 미 인기 TV다큐 캅스를 연상시키는 다큐멘타리 풍의 연출 요소는 이러한 편견의 리얼리티를 지나치게 높이는데 한 몫, 오락물의 정형화라고 넘기기에는 전반적 톤이 지나치게 편향적인 느낌이였다. 실제 미국 뒷골목의 실상이 그 이상의 폭력과 불법이 판친다 해도 단지 영화의 주제 하나를 부각시키려고 또 다른 삐뚤어진 편견을 만드는데 동참했다는 점에서 영화는 확실히 아쉬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 차라리 슬럼가의 공포와 우범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보다 영화 내용의 큰 줄기인 주인공과 고참형사의 갈등에 더 치중하는 균형을 보여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후반부에 주인공을 도와주는(?) 슬럼가 주민들의 모습은 일정한 감동을 주는데는 성공했지만 과연 그 씬 하나로 영화 전반에 걸쳐 뿌리깊게 박힌 슬럼가와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이 일소될 만큼 충분했던 것인지는 의심스러웠다.
결론 - 신고식이 악몽이 될 때.
영화 트레이닝 데이는 단순히 형사들의 부패를 묘사하거나 스릴러의 차원을 넘어 가치관의 혼돈과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파시즘적 사고를 경고하는 은유로 해석될 만한 영화다. 폭력과 범법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는 한 부패 형사의 일대기에서 지금의 미국이 선도하는 지나친 폭력적 전쟁의 정당화를 보고 있는 느낌 역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점잖은 연설과 정당화라는 특기로 미국이 벌이는 정의의 전쟁 뒷면엔 오폭과 인종차별이라는 또 하나의 폭력적 테러의 정당화 역시 도사린다는 한 예에서 이 영화, 트레이닝 데이 한편이 주는 교훈은 남다르다. 권력이나 제도의 이름 속에 숨은 교묘한 폭력의 합리화를 비판하는 해석의 영화라고 평해도 과히 꿈보다 해몽이 지나치다고는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트레이닝 데이는 확실히 시간 때우기 형사물을 넘어서 사회비판적인 주제의 영화로 해석될만한 역량이 충분한 영화다. 신고식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트레이닝 데이를 보라. 신고식이 얼마나 악몽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네리뷰어 광개토 kakemu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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