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감시(監視)’란 자못 흥미로워 보인다. 그러나 실상 감시라는 것은 시각적으로는 자신을 은폐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오히려 자신만을 노출시키는 행위이다. 키에슬롭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보여주듯 관음증의 쾌감은 찰나일지언정 그로 인해 감시자에게 전해오는 감정의 폭풍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감시자는 결국 (자신의 의무와는 반대로) 자신을 피감시자와 동일시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타인의 삶>은 바로 그런 역전 현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다.
통일 전 동독의 비밀경찰인 비즐러는, 매우 유능한 수사관이다. 그는 감정으로 호소하는 용의자에게 결코 속지 않고 비인간적 면모를 발휘하여 자백을 받아내고 만다(덧붙이자면 벤 킹슬리와 흡사한 배우의 외모는 이러한 이미지를 심어 주기에 더없이 적당하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다져진 그의 눈썰미는 친(親)정부 예술가 드라이만을 보고 한눈에 그가 반체제인사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드라이만과 헴프 장관이 대립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그가 충성하는 대상이 당 자체는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 폴 하우저의 입을 빌어 감독은 직접적으로 드라이만을 정의한다. “끔찍한 이상주의자”라고.
이 씬(Scene)과 다음 씬을 이어붙인 것은 명백한 감독의 의도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식당 씬에선 그루비츠와 대화를 나누던 비즐러가 자신의 임무가 ‘조국’이 아닌 헴프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 두 장면을 붙여서 드라이만과 비즐러의 유사성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즉 그들은 현 동독 체제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이데아를 신봉하는 쪽에 가까운, 어찌 보면 순진한 인물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이상주의자들은 헴프(이 인물은 현대극에서 보기 드물게 복합적 성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대악이다)의 욕정으로 비롯하여 의도치 않은 변화를 겪게 된다.
지향점이 유사한 두 인물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감시한다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하여도 결국은 동화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헴프의 말(“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을 비웃기라도 하듯 냉혈한 비즐러는 점차 변모하기 시작한다. 비즐러가 점차 드라이만에게, 혹은 크리스타에게 감정이 이입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인질범이 인질에게 동화되는 리마 신드롬의 진행을 생생히 중계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비즐러의 경우는 정도가 심각한 것이, 그가 이 연인들에게 받는 영향은 단순한 동화(同化)의 수준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가 우편검열원으로 강등되었다는 결과를 배제하더라도, 그가 크리스타를 심문하는 장면을 오프닝 시퀀스와 비교할 때 이러한 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비즐러는 그들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으며, 크리스타에게 연정을 느낀다고 말할 수도 없다(오히려 그는 욕정을 느끼는 헴프를 경멸함에 가깝다). 그럼에도 폴의 탈주 작전을 묵과하고, 심문 뒤 부리나케 돌아와 타자기를 미리 숨겨두는 비즐러의 모습은 드라이만-크리스타의 ‘수호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동화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흡수된 것이다.
감시자는 어떤 의미에서 관객의 입장에 놓인다. 자신을 은폐하고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감시자와, 감시자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피감시자의 위치는 얼핏 상하관계에 놓인 듯하다. 그러나 오히려 감시자는 피감시자의 일상을 마치 연극과 같이 바라보는 관객에 다름 아니다. 헴프의 차를 타고 돌아온 크리스타를 따뜻이 감싸 안는 드라이만을 보면서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는 비즐러의 모습이 바로 연극에 동화된 관객의 모습이다. 그러나 흐트러진 크리스타 앞에 나서 “당신을 사랑하는 관객”을 자처하는 비즐러의 모습은 현실의 관객의 위치를 넘어서, 극에 개입하려 하는 이른바 관객 판타지의 실현이다. 어쩌면 이를 기점으로 하여 비즐러와 그들의 경계는 비즐러 자신에 의해 서서히 희미하게 되었으며 그 순간부터 그들의 일견 풍요로운 삶은 혼자서 저녁을 차려 먹는 비즐러의 삶의 여백을 빈틈없이 채워 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이란, 비즐러의 삶에 속속들이 스며든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비즐러의 삶은 더 이상 비즐러 자신의 삶이라고 말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은 아닐까.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슬프다. 그래서 비즐러의 마지막 대사인 “아니오, 제가 볼 겁니다.”라는 말은, 드라이만의 삶, 크리스타의 삶, 그리고 종국에는 비즐러 자신의 삶을 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읽는 탓에 슬프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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