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에게는 "무섭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다. 물론 공포영화적 쾌감 외에 튼실한 이야기거리와 메시지가 함께 있다면 더더욱 수작으로 칭찬받을 수 있지만 공포영화로서의 재미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말할 것만 많은 공포영화는 공포영화로서의 기능면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과 일본 공포영화가 이런 것 같아 걱정이다. 물론 다양한 소재를 꾸준히 발굴하고 매해 여름 적당량의 공포영화들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이 장르의 활성화에 도움은 되겠지만, 새로운 건 단지 소재에 그칠 뿐 사다코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주얼과 복잡한 사연에 너무 욕심낸 나머지 정작 그 사연들을 지루한 말로 늘어놓으면서 공포감을 확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다. 공포영화가 무섭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링>, <주온> 등으로 아시아 호러의 시발점이 되었던 일본조차도 <유실물>, <데스워터> 등의 기도 안차는 졸작들을 양산하며 점점 그 위치를 한국에 양보하려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21세기 들어 헐리웃에서 주목하고 있는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서 이들을 제대로 찔리게 할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사실 영국에선 2005년에 나왔으나 우리나라에선 2년이 지난 지금에야 개봉하는 영화 <디센트>. 사실 이 영화는 오히려 소재면에서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최근 몇년 간 나온 공포영화 중 가장 무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문제는 무엇으로 무섭게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무섭게 하느냐다.
사라(쇼나 맥도널드), 주노(나탈리 잭슨 멘도바)를 비롯한 몇 명의 친구들은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여인들이다. 그런데 어느날 이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래프팅을 즐기고 난 뒤 귀가길에 사라의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남편과 딸 모두 목숨을 잃고 만다. 이 비극적인 일이 있은지 1년 뒤, 주노는 사라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동굴 탐험에 초대한다. 다시 만난 6명의 친구들. 과거의 상처를 잊고자 동굴 탐험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금 충격적인 일이 닥친다. 그들이 들어 온 동굴은 계획에는 없던 미지의 동굴이었던 것. 거기다 바위가 무너져내려 입구까지 막힌 상황에서, 그들은 일단 안으로 계속 들어가 출구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 동굴 안에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의문의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들은 이내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다. 동굴을 빠져나오기 위해선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괴물과 대면해야 한다. 과연 그들은 이 동굴을 살아나갈 수나 있을까?
앞서 말했듯 막상 이 영화의 소재와 이야기 전개를 보면 새로울 것이 별로 없다. 새로운 소재의 발굴이 아닌, 밀폐된 동굴에서 의문의 괴물들과 맞닥뜨린다는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갈래 길을 지닌 결말을 제외하고 영화 보는 내내 특별히 예측불허의 불친절한 전개를 보여준다거나 하는 부분도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단순한 기반 위에 공포영화에서 맛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양념을 고루고루 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가 단순하되 진국인 공포영화임을 깨닫게 한다. 그 여러 특징들을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하는데, 다소 자세하게 설명하더라도 결정적 부분은 언급을 자제할 것이니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진 마시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백문이불여일견이다.
첫째는 밀실공포다. 이 친구들은 원래부터 보기와는 다르게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며 모험을 지향했던 친구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익숙한 루트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동굴 탐험도 마찬가지다. 이미 알려진 동굴을 안내서를 따라 탐험하는 건 여전히 재미있는 익스트림 스포츠지만, 전혀 들어본 적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은 동굴에 떨어진 순간 그것은 공포가 된다. 더군다나 그나마 나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빛을 내려주던 입구마저 무너져 닫혀버린 뒤, 이 친구들에게는 이 생소한 동굴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 된다. 루트가 어떤지 전혀 알 수 없는데다 한 치 앞이 깜깜하지, 거기다 함부로 숨쉬었다간 산소가 부족할 것 같이 협소한 공간은 그나마 여유롭던 그들의 심리를 조금씩 조여오기 시작한다. 영화는 촬영을 위한 인위적인 조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듯 가능한 한 자연광을 이용하며 동굴 속 극한의 상태를 최대한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온다. 사실 영화 속 화면이 어두우면 대개 지루하고 졸립기 쉬운데, 이 영화는 동굴 속 사방이 꽉 막히고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절망적인 분위기를 큰 스크린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동굴 속 주인공들의 상황 속으로 더 잘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인 장치로서 작용한다. 동굴 속을 지배하는 거대한 어둠은 어디든 도사리고 있을 위험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고, 사라가 사용하는 주무기(?)인 적외선 카메라는 그 어둠 안에 버티고 있는 실재하는 공포를 보여줌으로써 더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다.
이런 밀폐된 공간 속에서의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바로 괴물의 등장이다. 사실 이 괴물의 겉모습은 혹자는 "골룸"을 이야기할 정도로 그렇게 크게 끔찍하거나 무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어둠만이 지배하는 이 낯선 동굴에서 이들의 등장은 굉장히 공포스럽다. 마치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순간이 한밤 중에 낯선 길을 혼자 걷다가 맞은 편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인 것처럼. 다른 공포영화 속 살인마나 귀신과는 달리 이 영화 속 괴물들은 등장하기 전에 어떤 낌새도 보여주지 않는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어쩌면 그들은 계속 몸을 숨기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 상황에서 불쑥불쑥 나타남으로써 주인공 일행들에게 심각한 공포감을 안겨준다. 이건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일체의 낌새도 없이 어느 순간 코앞에 나타나 있는 괴물들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거니와, 그들이 등장하지 않는 순간에도 어둠 저편에서 노려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일으키며 관객들을 끊임없이 긴장하게 만든다. 이 괴물들이 사람을 만났다 하면 하는 짓도 워낙에 끔찍해서 더욱 그렇다. 괴물들이 일삼는 행동에서는 이 영화의 고어적 특성도 어느 정도 드러나는데, 그렇다고 대놓고 신체가 찢기고 훼손되는 장면을 묘사하는 건 아니고 어둠 속이라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이기에, 적막한 어둠을 가르는 외마디 비명은 그 실체를 보여주지 않아서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화룡점정 역할을 하는 것이 극한 상황에 다다른 인간의 뒤엉킨 심리다. 그렇지 않아도 서로에 대해 다소 꺼림직한 감정을 지닌 친구들이 우정을 다시 다지고자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이 마당에 우정은 2순위 이하로 밀려난다. 동굴 다른쪽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면 그 친구를 걱정하기보다는 괴물이 제발 그 목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가주기만을 바라는 것이 이들의 심리고, 어쩌면 이런 극한 상황에 몰릴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게 될 심리다. 더구나 안그래도 사면초가인 이 동굴 속에서 친구들을 둘러싼 생각지 못했던 진실이 밝혀지면서, 힘을 합쳐도 모자랄 마당에 서로를 의심하며 더욱 상황을 살벌하게 만든다. 여기에 1년 전 가족을 잃은 사라의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다시 눈을 뜨면서 이들 앞에 놓인 상황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혼란에 직면한다. 친구를 향한 죄의식과 불신, 개인의 정신적 혼란까지 겹치면서 동굴 속은 최악의 공포를 안겨주는 장소가 된다. 이처럼 이 영화 속 공포의 요소는 첫번쨰로 어둠, 두번째로 괴물, 세번째로 인간의 꼬인 심리상태가 한겹씩 쌓이면서 관객들의 심리를 갈수록 막장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요소들 외에도 <디센트>가 공포영화로서 빛을 발하는 요소로는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다른 공포영화들 같았으면 동굴 속 괴물이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생겨난 거라고 결말에 가서 좔좔 설명하는 바람에 김이 다 빠지게 했겠지만, 이 영화는 그런 설명을 일절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주인공들의 스쳐가듯 하는 대사들을 통해 그 괴물들이 어떻게 생겨났나 일말의 추측이라도 할 수 있을 뿐, 이 영화는 긴장감을 단숨에 제거해버릴 기나긴 설명은 거부한다. 단지 어떤 설명도 없이 나타난 괴물이고, 어떠한 이유도 밝혀지지 않은 채 희생당하는 사람들이기에 어쩌면 더 공포스럽다. 한때 불가사의로 불렸던 미스터리 서클이나 설인의 존재처럼, 이들 괴물의 존재에 대해서도 어떤 이유가 없기에 그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불가사의한 현상같고, 그래서 더 밑도끝도 없는 공포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잔혹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을 장기로 밀고 나가기보다는 갈수록 막장이 되어가는 상황을 통해 심리적 압박을 만만치 않게 불어넣는다는 것도 이 영화의 장점이다. 미지의 괴물이라는 위협적인 존재가 등장하고 이들에 맞서기 위해 주인공들이 잔혹한 액션을 구사하긴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놀라게 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주인공들과 괴물들 간의 대치 상황을 긴박감 넘치게 묘사하면서 관객들의 심리를 코너로 몰고 간다. 두 눈이 소용없는 어둠 속에서 서로 코앞에 두고 숨을 죽이며 대치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벌벌 떨며 식은땀을 흘리는 이들과 함께 보는 나까지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이건 그저 시각적으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데만 집중했던 다른 공포영화들에서는 진작에 보지 못했던 수준의 제대로 된 공포감이다. <주온>과 <그루지>를 통해 제아무리 무섭던 가야코와 토시오도 이제는 친근해지고 만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골룸처럼 시덥잖게 생긴 괴물이라도 어느 순간 그 괴물은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도 대단한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와 더불어 등장인물이 모두 여자라는 점도 어쩌면 이런 심리적 공포를 강화하는 요인이 되지 않나 싶다. 초반에 등장하는 사라의 남편을 제외하면 모든 등장인물은 여자로서(괴물들은 성별을 알 수 없기에 제외) 이들 외에 특별히 외부인물이 등장하지 않기에, 이들이 처한 상황에만 온전히 몰입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연약한 여자들이 맞닥뜨리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 속에 관객들은 더욱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진짜 끝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두 갈래의 결말은 끝내 이 참혹한 체험의 끝을 모호하게 맺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이 동굴 속에서의 경험을 더욱 끝을 알 수 없는 수렁의 이미지로 각인시킨다. 어설픈 반전보다도 더 공포스러운 혼란으로 끝을 맺는 이 결말까지 영화는 평화롭던 시작에서 완전한 심리적 "하강"(디센트,descent)으로 관객들에게 심리적 막장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이 영화에는 확 놀랄 만한 반전도, 뼈 있는 메시지도 별로 없다. 그러나 고어와 액션, 예상치 못한 갈등 속에서 빚어지는 정신적 압박의 절정은 공포영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무서워야 제맛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새삼 확인시키며 이 영화가 공포영화로서 갖는 독보적인 메리트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이 영화 <디센트>는 시각적으로 꽤 볼만하겠다 싶어 들어갔다가 정신적으로 막장을 체험할 영화, 이미 어둠의 루트로 많이 퍼졌지만 진정 극장에서 봐야 그 정신적 압박을 제대로 실감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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