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 자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거나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마냥 기차에 몸을 싣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느즈막한 저녁의 기차 안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하루 동안의 피곤에 찌들려 잠에 취한 회사원, 다정한 모습으로 찰싹 달라 붙어있는 연인의 모습, 그리고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사람들의 모습까지...영화 [경의선]에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사연이 담겨 있고, 진솔한 일상이 담겨 있는 영화이다. 마치 어정쩡한 멜로 드라마를 보는 듯한 포스터와는 달리 남자와 여자로서의 진심과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의 솔직함이 묻어나는 휴머니즘 드라마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영화이다. 요즘 한창 관객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시끌벅적하고 쉴새없이 날아다니는 컴퓨터 그래픽의 향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와 작은 여운이 남는 휴식처같은 느낌의 영화가 바로 박흥식 감독의 [경의선]이다.
서울역에서 경의선행 기차에 몸을 싣는 한 남자가 있다. 힘없는 뒷모습과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표정의 이 남자는 서울 시내 지하철 기관사인 김만수이다. 그리고 술에 취한 듯, 아니면 피곤함에 지친 듯한 모습으로 여행가방 하나를 들고 신촌역에서 경의선행 기차에 몸을 싣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가장 의미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대학교 시간강사 이한나이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어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아픈 사연을 가진 듯한 모습의 두 남녀는 그렇게 서로 다른 역에서 ‘경의선’이라는 같은 기차를 타게 된다. 영화 [경의선]은 제목처럼 경의선행 기차를 탄 서로 다른 남녀가 주인공이다. 이렇듯 영화 [경의선] 속의 두 주인공은 서로 다른 역에서 기차를 타는 모습처럼 각자 다른 모습의 삶을 가진 사람들이다. 지하철 기관사인 만수는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노선을 따라 운행하는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 만수에게는 지하철과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는 승객들이 하루를 보내며 마주치는 전부이다. 그리고 만수에게 유일한 일상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한달에 한번씩 그가 오는 시간에 맞춰 새로 나온 [샘터]라는 책과 도넛츠, 커피를 준비해서 주는 한 여자이다. 겉으로는 당당하고 세련미 넘치는 대학교 시간강사인 한나는 자기 스스로를 언제나 보잘 것 없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여긴다. 그녀는 각자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그저 몇 시간씩 대학교에서 강의를 해주는 시간강사인 자신을 무능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한나에게도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 있다면 바로 사랑하는 한 남자이다. 그는 대학교때 만나 독일 유학시절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 지금은 대학교 교수가 된 선배이다. 이렇듯 영화 [경의선]은 만수와 한나라는 두 사람의 모습을 조용하면서도 천천히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결코 꾸며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부족해 보이지도 않는 보통 현대인으로서의 그들을 가만히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마주치게 되는 장소에서,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직업을 가진 두 주인공을 통해 영화는 관객들에게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오고, 편안하게 이야기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마치 가슴에 사연을 담고 경의선행 기차에 몸을 실었던 만수와 한나를 보며 나 역시도 함께 기차에 올라탄 느낌을 가지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다시 1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만수와 한나의 일상을 쫓는다. 은행원, 국회의원 보좌관, 그리고 지하철 기관사까지 한나에겐 그 어떤 사람들도 자신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가치있는 존재이다. 그저 학교를 가고, 학생들에게 항상 같은 공부를 가르치고, 과제물 채점을 하는 등의 일상이 한나에겐 언제나 무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종종 전화를 해서 들려오는 엄마의 잔소리들이 그녀의 일상에 있어 존재감을 확인 시켜주는 것일 정도로 한나의 일상은 딱딱하고 건조하다. “몇시몇분”을 입에 달고 사는 기관사 만수의 일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악몽이다. 알람을 맞춰 놓고 자지만 그는 언제나 악몽을 꾼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알람시계 보다 먼저 일어나는 습관이 있다. 마치 직업병을 가진 듯한 그의 일상 역시 한나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시간만큼, 정해진 길을 다라 움직이는 것이다. 영화 [경의선]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조용히, 아주 찬찬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만수와 한나의 일상을 따라다니며 마치 한 편의 ‘인간극장’을 보는 듯한 모습으로 그들의 일상을 포착한다. 그런 두 주인공의 일상은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일상이기에 관객들은 스스로 자신을 영화 속에 투영시키게 된다. 아니 어쩌면 만수와 한나를 따라다니는 카메라의 눈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시간강사로서의 한나, 지하철 기관사인 만수의 일상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의 사람들이 가진 일상이며, 그 일상은 곧 지금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찾아지는 편안함과 꾸밈없는 그대로의 모습이 전하는 현실성이 [경의선]이라는 영화 한편을 단순히 ‘작은영화’ 혹은 ‘비주류’영화 정도로 스쳐 지나가 버리기엔 아깝게 만들어 준다.
기차에서 잠 들어버린 만수와 한나는 경의선의 야간 마지막 종착역인 임진강역까지 오게 된다. 쏟아지는 눈 때문에 택시도 부를 수 없는 상황에서 둘은 마냥 무언가가 나올 때까지 걷기로 한다. 마치 유부남, 유부녀처럼 거짓 통화까지 하면서 경계심을 보였던 둘이지만 금새 서로의 사연을 조금씩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순간부터 현실적이지만 무미건조했던 일상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조용하면서도 체온이 느껴지는 사람이야기를 시작한다. 당당하게 사랑했지만 현실에서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진 한나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즈막히 알아버린 만수의 이야기를 통해 둘은 조금씩 닫혀 있던 마음을 열게 된다. 사랑에 대한 상처를 가지고 경의선을 타게 된 한나와 현실 속 아픔을 가슴에 담고 경의선에 몸에 실은 만수의 사연은 서로에게 조금씩 연민을 가지게 하고, 결국 서로가 가슴 속 상처를 보듬어 주기에 이른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쭉 따라다니던 일상에서 벗어난 만수와 한나의 만남과 그들의 나누는 대화는 어색함이 엿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은 오히려 관객들에게 편안함으로 다가오고, 어색한 두 사람의 대화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순간 관객들 역시 그들의 사연에 취하게 되고, 그들이 가진 상처를 이해해 주고, 보듬어 주려 하게된다. 추운 겨울밤, 차가운 눈과 함께 나누는 만수와 한나의 아픔이 담긴 대화는 그러한 배경과는 다른 따스함과 인간으로서의 체온까지 느껴지게 해준다. 어색하고 담담하게 시작하지만 편안하고 따뜻하며 진솔한 그들의 대화는 영화 [경의선]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차역에 나란히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 [경의선]의 포스터는 평범하지만 참 따뜻한 느낌으로 와 닿는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 속 두 주인공인 김강우와 손태영이라는 배우 때문일 것이다. 연기의 카리스마가 그리 강하거나 대중성이 강한 배우가 아니면서도 전혀 낯설지만은 않은 두 배우의 이미지가 포스터 속 느낌처럼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우선 [해안선][실미도]를 통해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김강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스쳐 지나가는 지하철 기관사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해 낸 김강우는 영화 [경의선]을 보는 내내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기존에 다소 날카롭고, 딱딱한 이미지가 아닌 인간적이고 편안한 이웃집 총각같은 느낌의 연기로 색다른 느낌을 전달해준다. 그리고 시간강사 이한나를 연기한 손태영은 꾸밈없고 차분한 연기로 일상적이고 평범한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 TV드라마를 통해 그다지 이미지강한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가 아니었기에 영화 [경의선]을 통해 보여준 현실적이면서도 아픈 상처에 힘들어하는 ‘한나’라는 캐릭터는 연기자로서의 손태영을 다시금 느껴보게 해준다. 이렇듯 영화 [경의선]의 만수와 한나라는 캐릭터가 주는 가장 큰 매력, 즉 평범함과 현실적인 모습이 김강우와 손태영의 가하지 않은 연기와 꾸밈없는 표현으로 영화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영화 [경의선]은 앞에서도 여러 차례 말했듯이 만수와 한나라는 두 캐릭터의 일상과 사연을 담은 영화이기에 그 무엇보다 연기자의 몫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김강우와 손태영이 보여준 연기는 영화 속 캐릭터의 현실감과 인간미를 더욱 살려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봄날은 간다][여고괴담2][내 머릿속의 지우개]등에서 작지만 강한 느낌의 이미지를 보여준 백종학과 목소리로만 들을 수 있는 중견배우 박정수의 목소리는 영화를 보면서 반가운 느낌을 들게 할 것이다.
사실 영화 [경의선]은 참 보기 힘든 영화이다. 물론 많은 극장을 통해 쉽게 접하게 되는 블록버스터나 인기 있는 한국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만대도 몇 만명의 관객들이 몰려들 정도의 상업성과 대중성을 갖춘 감독이나 배우도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침체되어 있는 한국영화계 속에서 거대한 헐리웃 블록버스터 한 편과 대결 아닌 대결 속에 빠져든 시점이기에 영화 [경의선]은 어쩌면 조용히 묻혀 가게 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경의선]은 제목인 경의선이 주는 느낌처럼 더 나아갈 수 있지만 막다르게 된 곳에서의 낯선 만남이 주는 어색함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해지는 편안함을 통해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영화임에 분명하다. 영화 속 만수와 한나의 일상을 천천히 따라다니고, 둘의 아픈 사연을 조용히 듣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감정 속에 빠지게 되고, 영화 속에서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영화 [경의선]은 영화 속 만수와 한나의 모습처럼 눈에 띄거나 커다란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다만 조심스럽게 바랄 수 있는 건 시끄럽고 복잡한 일상 속에서 소수의 몇 명의 관객이라도 영화 [경의선]이 주는 여유와 진솔함을 느껴봤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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