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방송사에서 장기간 방영했던 프로그램 중에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부모님 따라서 종종 TV를 통해 보곤 했었는데, 늘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행복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체 저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불행에 고난이 모질게 겹치면서도, 그것이 금방 실화라는 걸 깨닫게 되면 저런 삶이 실제로 존재하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얼얼해지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이 프로그램이 이야기하는 건 프로그램 제목처럼 "이런 게 인생"이라는 것이다. 밋밋하고 편안하기만 한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것, 힘들고 지칠수록 삶으로서의 가치는 더욱 견고해진다는 것이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마치 2시간짜리 <이것이 인생이다>와 같지 않나 싶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여느 TV프로그램처럼 사연의 평범한 나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길로 나선다. 그 젊은 나이에 겪은 수많은 아픈 질곡을 드라마틱하게 배치하면서 점점 가치를 더해가는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화려하고 능수능란한 영상과 함께 분위기는 무지하게 명랑하고 웃기다.
여자친구와 이별한 채 집안에 홀로 틀어박혀 포르노 보는 것으로 소일하는 도쿄의 백수 쇼(에이타)는 어느날 아버지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는다. 아버지가 보여준 것은 웬 유골함. 사실 쇼에겐 마츠코라는 이름의 숨겨진 고모가 있었는데, 행방이 묘연하던 마츠코 고모가 최근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집으로 내려가는 아버지 대신 고모의 유품을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쇼는 쑥대밭이 다 된 마츠코의 집으로 향하고, 주변에서 요상한 이웃과 살인사건을 수사중인 형사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츠코의 다사다난했던 일생에 대해 듣게 된다. 중학교 교사로 빼어난 노래실력을 자랑하며 사랑받다가 불륜에 뛰어들고, 몸을 팔고, 사람을 죽이고, 교도소에 들어가고, 야쿠자의 여인이 된 뒤 초라한 죽음을 맞이한 여인, 가와지리 마츠코. 과연 25년의 시간동안 그녀에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제목에서처럼 이 영화는 마츠코라는 여인의 일생을 조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때문에 다른 등장인물들은 관찰자 혹은 조연급 비중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마츠코 역의 나카타니 미키가 보여주는 연기의 존재감은 가히 절대적이다. 30년 가까운 연령대를 넘나들며 모범적인 교사, 윤락가에서 일하며 찌들대로 찌든 여인, 청순가련형의 순정파 여인,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하며 점점 망가져가는 뚱보 여인 등의 다양한 성격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해내는 그녀의 모습은, 배우가 한 역할 속에서 보여줄 수 있는 연기 범위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는 것같다. 때론 뮤지컬 주인공처럼 명랑발랄하게, 때론 사회고발물 속 주인공처럼 현실에 병든 여인으로 변화무쌍하게 변신하는 그녀의 모습은 배우로서 그녀가 대단한 진가를 지니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물론 이 마츠코 주변에서 등장했다 사라지는 많은 배우들 역시 안정된 연기로 영화의 감동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마츠코의 일생을 낱낱히 목격하는 조카 쇼 역의 에이타, 마츠코의 최후의 남자가 되는 제자 류 요이치 역의 이세야 유스케, 마츠코의 절친한 친구였던 AV 회사 사장 사와무라 메구미 역의 구로자와 아스카 등 베테랑 배우들의 저마다 다른 색깔의 연기가 형형색색의 영상만큼이나 영화를 더욱 화려하게 빛낸다. 더불어 카메오급으로 등장하는 시바사키 코우의 특유의 무심한 듯 시크한 연기와 각본가로 더욱 명성이 자자한 쿠도 칸쿠로의 거친 연기도 인상적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극명한 대립이다. 마츠코가 지나는 삶을 아무 장식 없이 담백하게 묘사한다면, 이건 절대 코미디가 될 수 없다. 모범적인 교사가 한순간에 윤락가 여인으로까지 몰락하고 살인까지 저지르며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는 이야기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최루성 스토리라인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비극적 이야기 얼개 위에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원색적이고 밝은 미술과 경쾌한 음악, 가벼운 율동을 덧붙여 뮤지컬 스타일로 변화시킨다. 그렇게 범상치 않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마츠코는 쉴새 없이 노래하고 춤추고 웃는다. 이렇게 비극을 우습게 표현하는 모습이 처음엔 적응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집중하고 있으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그랬듯이, 비극은 반대로 우습게 보여질 때 가장 비극적일 수 있다는 것을.
두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동안 마츠코는 저게 과연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모두 가능한 일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다양한 깊이와 난이도의 시련을 거친다. 쉴새없는 마츠코의 인생의 전환에 관객은 웬만큼 한눈 팔 구석이 없이 순식간에 빨려들고, 그러한 마츠코의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눈이 따가울 정도의 원색적인 색감과 희극적인 표정연기, 때때로 사용되는 과장된 CG는 거기에 더욱가속도를 붙인다. 대충 사연만 들으면 마치 그저 그런 통속극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지만 영화는 여기에 더욱 발랄한 화면과 가벼운 음악을 덧붙임으로써 이렇게 시위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 나 더럽게 통속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하더라도 할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은 뭐 고상했던가. 우리의 인생도 사실은 지독하게 통속적일 뿐.
어렸을 때부터 놀이공원에서 펼치는 동화 속 공주들의 공연을 보며 마츠코도 그런 동화 속 공주같은 삶을 꿈꿨다. 하지만 정작 마츠코가 만난 삶은 동화같은 행복이 아닌, 동화라고 한다면 너무나 잔혹할 소외의 연속이었다. 교사직에서 해고당한 뒤에는 집안 식구들로부터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믿고 의지했던 남자들에게는 하나같이 폭력과 속임수, 거짓된 감정에 당하기만 하고, 결국 불륜에 몸을 팔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삶의 바닥에 바닥으로 한없이 떨어진다. 결코 자신이 원하는 길로 향하지 않는 삶, 하지만 이렇게 삶이 그녀를 속이고 있는 동안에도 마츠코가 끊임없이 붙들고 있는 것은 행복에 대한 희망이었다. 영화 속 마츠코의 얘기를 통해서도 나오듯, 보통 삶에 비해 마츠코의 생애에서는 정말 이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될 시기가 수 차례는 왔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좌절하며 무너질라치면 이에 질세라 사뿐히 일어났던 것이 마츠코의 모습이었다. 교도소에서 기계처럼 사는 와중에도 나를 기다리는 사랑이 있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섰고, 모든 걸 잃고 자포자기하던 와중에도 아직 예전의 능력이 남아있다는 희망에 벌떡 일어서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렇게 행복해지고 싶다는 그녀의 간절한 소망마저도 세상은 매몰차게 외면한다. 그녀가 그토록 행복을 위해 쏟았던 노력이 모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세상은 폭력과 배신과 소외로 그녀를 멍들게 한다. 행복해지려는 건 사치라고 치더라도, 혼자이고 싶지 않다는 최소한의 소망마저도 세상은 쉽게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부대끼고 몸을 혹사시켜가며 하늘에 손을 내밀려 할 수록, 그녀를 붙잡고 있는 구덩이는 더욱 깊어졌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타인에게 뭔가를 줄 수록, 자신은 점점 너덜너덜해지는 삶. 결코 동화라고 할 수 없는 참혹한 삶이었다. 하지만 그런 삶마저도 영화는 동화적인 색채의 판타지처럼 그려간다. 그녀가 원했던 찬란한 판타지같은 삶에 그녀가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지옥같은 삶이 겹쳐져, 그 경쾌한 분위기에 웃고 있으면서도 어느덧 그녀를 안타까운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마츠코가 남들이 "혐오스럽다"고 피할 만큼 나락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삶을 지나는 과정에서, 실은 마츠코는 더욱 높은 경지의 인간으로서 나아가고 있었다. 나약한 여인으로만 여겨졌던 마츠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소외당하면서 철저하게 외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다른 건 몰라도 혼자이기는 싫다는 욕망은 더욱 간절해진다. 결국 그런 원초적인 욕망에 그녀가 이전까지 겪었던 온갖 배신과 폭력에는 아주 내성이 붙은 듯, 자신을 지독히 궁지로 몰아넣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게까지도 의지하고 싶어 한다. 자신을 그렇게 괴롭힌 사람을 용서하고, 행복을 빌어주는 것도 모자라, 사랑하기까지 한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 그녀에게 가해진 고난은 이렇게 그녀를 감정적으로 강하게 만들었고, 결국 원수마저 사랑하는 신과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마츠코의 갸륵한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처음에는 뭔 청승이냐며 외면했겠지만, 뒤늦게 이들은 깨닫게 된다. 마츠코라는 여인이 실은 혐오스런 사람이 아닌, 곁에 두고 오래 사귀었어야 할 사람이었다는 것을. 결국 그녀에게 가해진 참혹한 고통이, 그녀의 삶을 더욱 찬란하게 만든 것이다.
영화 내내 계속되는 희극적이고 경쾌한 분위기도 다시 생각해 보면,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주고 싶어했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빌었고, 타인이 그런 꿈같은 삶을 살게 되면 자신 역시 그런 삶을 얻게 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비록, 매정한 현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마츠코의 이런 믿음을 외면하고 결국 죽음 이후에야 진정한 안식을 주었지만. 삶을 얼마나 받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었느냐로 평가한다면, 그녀의 삶은 말 그대로 신적임에 다름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 내내 계속되는 코믹하고 발랄한 분위기 안에 그런 삶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몸을 혹사시켰던 마츠코의 고난이 중첩되며 그녀의 삶의 비극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이렇듯, 영화는 지극히 통속적인 삶을 지극히 가볍게 그리는 듯 하면서도 마츠코가 살았던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등급의 삶을 조명한다. 타인을 행복하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망가뜨렸던 삶. 그녀가 습관적으로 취했던 입술 찡그리는 표정도 이와 일맥상통하다. 늘 표정이 시무룩한 아버지를 웃게 하기 위해 어렸을 적부터 마츠코가 취했던 표정. 순수했던 어린날에는 그 시도가 아버지에게 통했지만, 어른이 되어 사회에서 그 시도는 "미친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사진에서 보여줬던 그 우스꽝스러운 표정도 실은 타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게 아닐까.
문득 마츠코의 삶을 보며 인터넷상에서 꽤나 잔뼈가 굵은 "카카오 99%"가 생각났다. 직접 먹어보진 않았지만 마치 연필을 씹어먹는 듯한 맛이 난다고 하는데, 그래도 향기는 카카오 특유의 진하고 기분좋은 향기 그대로 아니겠는가. 마츠코의 삶도 마치 이 카카오 99%같다는 생각을 해 봤다. 직접 체험해본다면, 마츠코의 삶은 쓰디쓰고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러한 참혹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마츠코의 일생은 얼마나 화사한 꽃향기를 내뿜고 있는가. 물론 이러한 마츠코의 인생의 가치는 결국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서야 발견되었고, 그녀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집에 돌아온 자신을 환영해줄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세상은 그녀의 가치를 결국 죽음 후에야 인식했고, 죽음 후에야 그녀의 소망을 들어주었기에, 세상의 이 여전한 비정함에 마츠코의 일생은 더욱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쉴새없이 정신 못차리게 하는 고난 속에서도 정신 바짝 차리기 위해 지독하게도 웃으며 삶을 이어온 여인의 이야기다. 단지 사랑을 원했고, 그래서 타인에게 사랑을 줬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랑을 되돌려받지 못한 여인. 현실의 매몰차고 싸늘한 모습에 너무도 순수했던 그녀가 꿈꾼 동화같은 삶이 겹쳐지며 영화는 결국 우리를 쉴새없이 웃게 하다가 어느덧 심장에 명징한 파문을 새긴다. 어쩌면 그녀가 죽고 난 뒤 뒤늦게 그녀의 삶을 보고 위대하다 하는 우리의 모습도 참 매정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일생이 결코 혐오스럽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혐오스럽기는커녕,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며 보듬어주고 싶은 삶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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