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보급도 지원도 받지 못한 이오지마의 일본 병사들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무력하게 죽어나간다. 조금씩 전선을 물리며 저항을 계속하지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은 점점 사라져간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 하지만 그들은 항복하지 않고 이오지마의 컴컴한 동굴 안에서 수류탄을 안고 자폭한다. '천황만세, 대일본제국 만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유명 피아니스트였던 주인공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을 피해 몸을 숨긴다. 죽음으로 가는 기차에 가족을 떠나보내고 홀로 살아남은 그는 허기와 추위 고독과 공포 속에서 은신생활을 한다. 목숨은 겨우 이어가지만 그의 정신은 점점 황폐해진다. 죽음을 손길을 피해 끊임없이 달아나야 하는 그는, 유태인이다.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북한의 종군기자인 주인공은 패전을 거듭하며 후퇴하는 북한군 유격대에 합류한다.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으로 숨어들지만 겨울이 깊어지자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휴전 소식이 오고가는 가운데 귀환을 꿈꾸지만 북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되고 최후의 전투에서 남한군에 의해 모두 죽음을 맞는다. 1949년부터 5년 간 소백지리지구유격전에서 죽은 군경과 빨치산 수는 무려 2만 명이었다.
세 개의 영화는 홉스봄이 칭한 '극단의 시대', 20세기를 설명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라는 거대한 이념의 쓰나미에 희생당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 시대와 권력에 짓밟혀 훼손당한 인간의 가치를 생생히 보여준다. 20세기가 이뤄낸 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첨단의 시대를 선물했지만 그와 동시에 이념과 폭력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시대가 남긴 상처와 분노 그리고 증오는 이 영화, 박치기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하지만 예로 든 영화들과는 분명 다른 화법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는 냉전이 한창이던 1968년 교토의 고등학생들이 벌이는 좌충우돌 성장기를 일상의 가벼운 터치로 그려낸다. 철없는 문제학생들의 패싸움, 운동장과 고교음악실을 배경으로 하는 청춘남녀의 풋풋한 로맨스. '우정'과 '사랑'으로 가득한 전형적인 학원물의 화법이다. 게다가 진지하지도, 영리하지 않다. 코믹하고 때론 엽기적이며 다분히 신파적이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진실은 앞선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엄숙한 국가주의, 이념의 충돌이 개인의 삶을 생채기내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얼마나 뒤틀어 놓는지 충분히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등학생들의 일상에 중첩시키고 그들(재일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오랜 반목, 한국전쟁으로 비화된 남한과 북한의 비극적인 역사를 은유한다.
국가, 이념과 같은 거대한 추상이 개인의 삶을 결정 짓지만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 또한 개인이다. 얼핏보면 개인의 삶이란 남루하고 초라해서 역사의 물결에 휩쓸리고 제 현실에 함몰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작은 노력, 그들의 작은 움직임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노래 '임진강'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서, '임진강'으로 은유되는 개천을 건너는 행위를 통해서 비극적인 과거사에 작은 화해의 물길을 낸다.
1963년,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 34세의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은 수많은 흑인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흑인 해방 운동사에서, 20세기 미국 역사에서 아니,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연설을 한다.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이전 노예의 자녀들과 노예 주인의 자녀들이 형재애로 한 식탁에 앉을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훗날, 남북이 함께 임진강에 나들이를 가고, 거기에 일본인, 중국인, 저 멀리 동남아시아인들도 찾아와 한바탕 잔치를 벌이는 그날이 오면 더이상 국가의 악령과 이념의 유령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때에는 국가도 민족도 인종도 나를 설명하는 일부일 뿐 그것들이 나를 지배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루터 킹이 꿈꾸었듯 나도 그런 날들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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