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2006/독일) : 별 4개
다 보고난 다음에야, 교과서적으로 잘 짜여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내내 몰입과 역설적 즐거움과 작은 감동이 반복해서 일어났고, 깊이 슬프기도 했다. 엿보기, 관음증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온힘을 다해 비즐러의 시선이 되어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에 감염되어 갔다.
실제로 동독 시절 비밀 경찰 하수인이 된 부인에게 감시받은 경험이 있다는 비즐러 역의 울리히 뮈헤. 조용하지만 진심어린 박수를. 그리고 깊은 슬픔과 예술적 갈망, 순수한 갈등과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한몸에 담고 연기한 드라이만 역의 세바스티안 코치. 격려의 박수와 따뜻한 미소를.
비즐러에 대한 찬사도 물론 아깝지 않지만, 난 드라이만의 삶에 더 깊이 감염되었다. 드라이만은 진실한 예술가였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 타협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지켜내기 위해 애썼다. 초기에는 그가 체제에 적당히 타협하며 예술을 하는 인물일거라 의심했다. 비즐러도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완벽한 하모니에 막연한 의심을 품었고, 먼저 그들을 감시하겠노라 제안했다. 비즐러는 자신의 선택이 올바를 것이라고 믿었다. 타인의 삶은 그에게 어떤 장애도 된 적이 없었다. 비즐러는 늘 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자신의 일에 대해 진정한 프로였으며, 그런 자신에 대해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드라이만은 진짜 예술가였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어떤 장애도 되지 않았다. 그를 도청하고 의심하는 것조차 그의 순수성 앞에선 나약하고 무능력하게 흘러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체제 안에서 자신의 예술을 펼쳐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삶의 방향을 빠르게 선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연출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부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체재를 비판하기보다 희망을 믿었다. 그는 나라와 친구와 동료와 예술과 애인을 동등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에 잔잔한 감동을 받은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동료의 능력을 믿었으나 동료의 고통을 진심으로 체험하지 못한 드라이만은 결국 동료의 죽음 앞에 오열한다. 애인의 사랑을 믿었으나 애인의 배신이 진실인지 아닌지 끝까지 판단을 유보해야 했던 드라이만은 결국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자신의 삶 속의 진실한 이면을 발견한다. 물론, 예술로 승화해낸다. 그는 천재성을 겸비하지도 않았고, 현실에 대한 상황판단을 잘 하지도 못했으며, 다른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보지도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체제에서도 자신의 진심을 다해 삶을 살아낼 줄 아는 진짜 예술가였다.
비즐러는 그렇기 때문에 드라이만의 삶 속에서 자신의 삶의 경로를 바꾸는, 기적과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삶으로 인해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비밀 경찰 대위로서 자신의 주가를 한층 높이고 있던 비즐러가 우편배달부 일로 한평생을 보내야 하는 선택을 한다는 건 어찌보면 선뜻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드라이만의 예술에 대한 순수한 집착과 연인에 대한 사랑에 진심으로 감염되었다면, 그가 감옥에서 몇 년을 썪고 자신의 예술성을 꺾어버리거나 연인을 권력에게 빼앗기고 고통스러워 할 앞일에 대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비즐러와 마찬가지로. 비즐러는 이제, 적극적으로 타인의 삶에 개입한다. 모두의 삶이 뒤엉켜 흘러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깐. 그래서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그는 왜 그랬을까? 스토킹하다 '느껴버린' 퀴어영화인가?’라는 한 줄 평을 남긴 것 같다. ‘느껴버리는 것’이 뭔지 제대로나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 영화가 ‘스토킹’과 ‘퀴어’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란 말인가? 이 영화에 열광하고 경의를 표한 많은 사람들은 다들 잘못 ‘느껴버린’ 것이라는 건가? 아무리 비평이 자유라지만, 읽고 나서 화나더라. 황진미씨의 다른 평에도 늘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데, 이번 것은 좀 더 불편하고 거슬렸다. 다른 시각은 반드시 존재해야 하지만, 그 다른 시각을 위해 늘 다르게 보려고 애쓰는 게 드러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것은 그의 비평에 대해 가하는 순수한 나의 비평이다. 오해하지 말아주시길.)
관음이나 엿보기. 맞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 누가 출산을 하고, 누가 이혼을 하고, 누가 자살을 한다는 기사가 검색 순위 1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도청과 시대적 상황이라는 보호막 아래 타인의 삶을 엿보는 행위가 ‘관음’을 충족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말한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의 본능이자, 우리도 모르게 늘 행하고 있는 습관인 것을. 이 영화를 즐감하고 싶다면, 되도록 시선을 그들의 삶에 맞춰 보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의 색, 넘치지 않는 음악, 배우들의 호연, 느슨해지지 않는 재미, 그리고 별 다섯 개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앤딩. 거기에 보너스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역사를 흥미로운 시각으로 회고하는 방법까지.
이들의 삶을 엿보고 온 나는 그래서 아직까지 즐겁게 공상한다.
(덧붙임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점 4개를 준 이유는, 비즐러가 타인의 삶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간다는 결정적 계기가 조금은 부족했다는 점, 크리스타의 캐릭터가 나로선 혼돈스럽기만 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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