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악취가 코를 찌르는 한복판에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라는 악마 같은 아이가 태어납니다. 사람들에겐 왠지 모를 혐오감을 주는 이 녀석에겐 어떠한 유산도 없지만 그가 만들어 내는 향취는 사람들에게 혼란과 죽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독일의 천재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걸작을 영화화 했던 ‘향수’는 ‘냄새’라는 인간의 오감(五感) 중 하나를 통해 인간의 재능과 소유욕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냄새는 다섯 가지 감각 중 가장 순간적입니다. 촉각이나 시각, 미각은 일정 형태를 지닌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데 청각이나 후각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청각은 가지지 못했는데 후각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성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고 그것으로부터 성격을 추론해 낼 수 있는데 무슨 캐풀 뜯어먹는 소리냐며 이의를 제기할 분도 계실 겁니다. 물론 그 의견도 맞습니다만 반대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그 말대로라면 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격이 없을까요? 청각으로 인간성을 판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향기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자주 쓰는 용어 중에 ‘사람냄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동네는 인심이 구수해서 사람냄새가 난다.’는 말처럼 냄새만큼 사람을 표현하기 좋은 감각도 없습니다. 냄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다시 ‘향수’로 돌아가 보기로 하죠.
그르누이는 몇 리 밖의 냄새도 구분 할 정도로 냄새에 있어서는 신과 맞먹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향기를 지니지 못해 불행한 존재죠. ‘향수’에서 다루고자 했던 이야기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그 무엇이 반드시 성취의 도구로 사용되지는 못한다는 비애감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화와 소설이 모두 가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과연 영화는 관객들에게 그 이야기를 잘 전달했을까요?
가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범하는 잘못은 원작의 장면화에만 힘쓰느라 정작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던 중심생각을 놓쳐버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에서도 향기가 없는 그에 대한 비애감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지만 그 이야기는 잠깐이고, 대부분의 시간은 탐미적인 영상을 보여주는데 모든 정성을 쏟아냅니다. 즉, 외형을 잘 다듬는 데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만 내면을 보여주는 데는 약간 실패했다고 봅니다.
그 이유를 설명 드리자면 그르누이라는 인물은 감정이라는 것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인물입니다. 웬만해서는 화내는 일도 없고 웃지도 않습니다. 마치 한 가지 일에 정신을 내놓고 사는 친구들처럼 시종일관 멍한 표정을 지으니 이런 인간의 외면에선 당연히 심리적인 부분을 잡아내긴 힘들 것입니다. 이런 인물 덕분에 소설을 접하지 않았던 사람에겐 영화가 상당한 무기력함을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럴 땐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인물의 내면을 증명할 사건을 소설과는 다르게 새롭게 창조해 낼 필요가 있었는데 원작을 훼손시키려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는지 창조정신의 부재인지 상당히 안전한 방법을 택하지만 이것이 영화를 조금 느슨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합니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영화 감상의 가장 큰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내레이션이란 영화에서 화면상에 담지 못한 표현들을 해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데. 굳이 이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쓸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인물이 워낙 감정이라는 것을 잘 표현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혹시 내레이션을 통해 그것을 전달하려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방법도 좋지는 않습니다. 창의력이 떨어지는 초짜 감독들이나 쓰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에 쓰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되는 예로, 최근에 개봉한 ‘일루셔니스트’역시 내레이션이 쓰이는데 이 영화에서의 내레이션은 우리가 화면으로 확인하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에 비해 ‘향수’는 부가 정보를 주는 것도 미처 담지 못했던 심리적인 부분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관객은 졸지에 그림책을 보면서도 해설자의 설명을 듣는 초등학생이 된 셈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이미지를 영상으로 표현했다는 공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또 한 번 문학이 영상예술보다 한 수 위라는 느낌을 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이처럼 영화 ‘향수’는 영화속의 쥬세페 발디니처럼 재현에 관한 욕망만이 존재하는 상당히 아쉬운 영화로 남고 말았습니다.
P.S. 부연설명 한 가지 더, 소설에는 '가질 수 없다면 완전히 태워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대목은 주인공 그르누이의 심리를 잘 표현한 글귀라 생각합니다. 영화속에서 이 부분을 대변해 준 것이 있었나 잘 생각해보세요. 사실 이것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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