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7일 스폰지하우스(종로), 혼자
2시 10분의 영화를 예매해 놓고 일찍 종로에 나섰다. 12시쯤 도착해서 서점에서 바람에 휘둘리는 나비처럼 펄럭펄럭거리다 길로 나섰다. 김떡순이 점령하고 있는 종로길을 10분쯤 내려가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눈이다. 작고 연약한 눈송이가 자꾸만 나를 힐끔거린다. 몸 전체가 희고 뚱뚱한데 까만테 안경과 까만색 지팡이로 멋을 낸 할아버지네 치킨집에 들어가서 치킨버거를 먹었더니 점원이 영수증을 거내며 그런다.
- 이 영수증을 들고 오시면 버거를 1,500원에 드려요.
원래 버거값은 3,000원이다.
눈이 그치지 않길래 나는 또 길로 나섰다가 편지지를 샀다.
극장에 앉으니 관객은 나를 포함하여 손에 꼽을 정도다. 열손가락이 다 필요없을 것 같다. 내가 극장주도 아니고 스폰서도 아니므로 나에게 관객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옹기종기 군데군데 몸을 파묻고 있는 낯선이들이 전혀 생판남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는 고전적인 시간흐름의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메멘토>같이 역전개를 보이면서도 <메멘토>같이 신경질적이지 않다. 시간의 흐트러진 방식은 몹시 사람을 안타깝게 했다. 내 목을 콱 틀어막고 있는 이 슬픔의 절반은 아무래도 자연스러움을 배반하는 시간의 흐름에 있는 것 같았다.
죽음은 어찌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지 사람들의 귀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최근에 나온 <이키가미>라는 만화책이 있다. 국가적 정책으로 죽을 사람을 정하여 그 대상이 된 사람에게 ‘당신은 3일 후에 죽게 됩니다....’ 어쩌구 하며 공식통보장을 날린다. 만화는 그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내게 만약 죽음 목소리의 볼륨을 맡긴다면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저음? 고음? 어느쪽이든 가혹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느날 갑자기 사랑하는 남편과 두 딸의 죽음을 들은 크리스티나에게처럼. 더 이상 잃어야 할 게 없는 사람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새로 얻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지금도 크리스티나 남편의 심장을 이식받은 폴의, 삶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종잡을 수가 없다. 그는 묘하게 이중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냉소적이었다. 그는 정말로 살고 싶어 했던가? 내가 보기에 폴은, 계속, 죽고 싶어 했다.
크리스티나도 폴도 어쨌거나 피해자의 입장이었다면 잭은 완전히 가해자였다. 크리스티나의 가족을 치고 뺑소니를 친 것은 명백한 죄였다. 게다가 그는 전과자였고 가진 건 아내와 두 아이들 뿐 매우 궁핍했으며 하류계층에 그의 빽은 오직 하느님뿐이었다.
잭이 괴로워하는 모습은.....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커다란 덩치가..어느 누구보다 움츠러들어서...교회에서 열광적으로 주님을 외치며 회개하고 불량청소년을 선도하던 모습이 괜시리 안타까웠던 것도 그가 언제나 잔뜩 긴장하여 죄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잭을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은 것도, 폴이 그를 쏘지 않은 것도, 그들의 슬픔은 왜이리 체념으로 뒤덮여 있는 걸까. 나는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급하게 화장실 가장 구석칸에 처박혀 변기위에 앉아 울었다. 그렇게 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화장실까지 가기 위해 나선 홀에는 새로 개봉 될 우리나라 청춘영화의 시사회가 있는지 무대인사를 하러 잘생기고 젊은 주연배우들이 와 있었고 곳곳에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 있었다. 터지려는 울음으로 잔뜩 찡그려진 얼굴로 급하게 문을 밀치고 나온 내게 박히던 시선들이 나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나는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전혀 아무것도 아프지 않았다.
다시 길로 나와 계속 걸었다. 연약한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길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작고 연약한 눈송이같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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