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을 존경한다. 물론, 그가 감독한 영화들은 '즐기면서'혹은 '편하게 볼 수 있는'영화들이 아니라는 점에선 흥행감각이 부족 한 것을 흠으로 잡을 수도 있지만, 영화의 완성도 만큼은 유명 철학가의 수준 높은 철학서를 읽는 듯이, 깊이 있고 장면 하나하나에 장인 정신이 담겨져있다. 게다가, 감독의 고유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헐리우드 영웅주의에 대한 반기'의 정신도 이 영화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게다가, 그런 감독의 스타일을 가장 잘 발휘 할 수 있는 '전쟁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영화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보통의 전쟁영화는 영웅을 예찬한다. 그 가장 단적인 예가 바로 '에너미 엣 더 게이트'인데, 이 영화에선 저격수 '바실리'가 영웅으로 등장한다. 그 외에도 진주만, 위 워 솔져스, 태양의 눈물 등의 많은 전쟁영화들이 영웅을 전면으로 내세워서 영화적 쾌감과 함께 화려한 스펙타클을 선사한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보면 전쟁은 영웅을 만드는 게임이 아니다. 전쟁 마다 위대한 영웅들이 존재하고, 그 영웅을 예찬하긴 하지만. 전쟁은 영웅을 만들 수가 없다. 영웅은 전쟁이 만들어낸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영웅도 적을 많이 죽인 군인 일 뿐이며 똑같이 전쟁의 참혹상을 보아온 사람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 촛점을 맞추어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영웅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즉, '영웅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표현된 세 명의 영웅은 단지 깃발을 세웠다는 이유로 국빈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헤이즈는 이런 영웅 대접에 부담스러워 하지만 개그넌은 이런 영웅 대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보통의 영화 같으면, 개그넌과 같은 캐릭터는 더욱 부각되고 개그넌을 복잡한 심리를 가진 캐릭터로 묘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개그넌은 총 한 번 잡지 않고, 적 한명 죽이지 않았는데도 영웅 대접을 받고 헤이즈는 그런 개그넌을 비웃는다. 하지만, 헤이즈는 후에 개그넌 역시 전쟁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고 서로를 화해한다.
이 영화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대사처럼 '내가 영웅이 아니라 함께한 전우들이 영웅이다'라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특별히 공을 세우거나, 줄을 잘 서는 사람이 영웅이 아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단지 전쟁의 참혹상만을 경험한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다. 죽은 시체를 보고 미쳐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 잔인한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의 공포는 어떻겠는가. 적진 한 가운대에 자국 국기를 꽂았다고 해서 그 꽂은 사람만이 영웅이 될 수는 없다.
게다가,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 처럼 이 국기는 재개양 된 것이다. 첫 번째 개양 할 때 찍은 사진이 구도가 이상하게 나와서 버려지고, 단지 두 번째 개양 될 때 찍은 사진이 좀 더 인상 깊어서 두 번째 사진을 사용 한 것이다. 즉, 영화는 영웅주의에 대한 반기와 함께 잘못된 진실로 인해 발생된 전쟁의 허무함도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영화내내 현재와 과거와 대과거를 이리저리 왔다갔다 거리는 이야기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이런 연출은 '감독이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도 같은 효과를 내어 감독의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전투씬은 정말 놀라웠다. 제작자가 스티븐 스필버그라서 그런지 몰라도, 의외의 스펙타클과 영상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많은 매체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전투신을 기대하지 말라'라고 하였기 때문에 정말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영화 중반에 보여진 이오지마 상륙씬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전투씬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명장면이었다. 특히, (이제는 익숙해 질때도 됐지만) 상륙신에서의 헨드헬드 촬영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고, 또 블리치 바이패스(화면에서 밝은 빛을 쫙 뺀것과도 같은 느낌의 영상화면.)를 사용하며 수묵화와도 같은 영상을 표현해냈다. 그리고 흔히들 '구로사와 아키라 샷'이라고도 하는 넓은 화면에 병사(이 영화에선 군함도.)가 개미알같이 움직이는 장면도 압권이었다.(트로이와 알렉산더에서 이 샷을 사용했었다.) 또, 보통의 전투신과 같은 긴박한 상황이 아니라 천천히 들것으로 부상자를 나르고 서로 잡담을 하면서 전투를 하는 장면을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너무 사실적인 것일까 아니면 허구일까?)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도 잔잔하면서 아름다운 음악을 선보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음악은 기대하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또, 이미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랐던 음향도 정말 거대하였다.(이 영화는 음향과 음향효과편집 두 개다 후보에 올랐다.) 전쟁장면에서 울리는 총소리와 폭탄소리. 그리고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함께 섞인 전투씬의 음향은 가히 장관이었다. 또, 군중들의 환호소리와 고요를 가르는 바람소리마저 귀를 자극하였다. 또, 이스트우드 감독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의 화려한 전투씬 비쥬얼도 눈부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결코 KO승을 하지 않는 감독이다. 영화 내내 관객을 향해 잽을 날린다. 그것도 결코 강한 잽이 아니다. 2시간 동안 잽을 날리면서 관객을 홀리게 하는 감독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이다. 헐리우드와 멀리 떨어진 주제로 헐리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들만을 만들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물론, 이 영화가 밀리언 달러 베이비보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가 선사하는 울림의 크기는 영화의 엔딩에 걷잡을 수 없는 감동의 소용돌이로 관객들을 내몰리게 한다. 미스틱리버 이후로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힘이 쫙 풀려 의자에 몸을 파묻게 된다. 영화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스트우감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또 다른 이오지마 연작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가 개봉되길 간절히 바랄뿐이다. 이 영화는 충분히 걸작 반열에 오를 만한 전쟁영화이다. 전쟁영화가 가지는 스펙타클의 한계를 뛰어넘어 스토리로 승부하는 전쟁영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런 전쟁영화는 찾기 힘들 것이다.
20자평 - 피아노의 가장 아랫 건반부터 가장 윗 건반까지를 조율하는 듯한 울림. 이스트우드이기에 가능하다.
비슷한 영화 - 용서받지 못할 자
유의사항 - 연작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도 개봉하길.
이 장면만은 - 상륙 전날 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과 함께 고요한 바람소리만이 들리는 침묵의 전함. 전후에 세 영웅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