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시작은 '혼자'였다.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모여 살았고, 지도자가 필요했으며, 우두머리가 되길 원했고, 결국 왕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는 보편성과, 높은 위치나 힘에 대한 반발심과 비틀어진 욕심, 그리고 '뭉침'이 가지는 힘에 대한 자각과 그 움직임은, 한 시대에 '혁명'이란 단어를 붙이게 했고, 그로 인해 생겨버린 현재에, 나와 당신은 살아가고 있다.
시대와 사회를 읽는 범위와 그 정도, 그리고 관점은,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이고, 모두가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관념'과 '지식'은, 반드시 그 '시대'와 상충하기 마련이라는 것.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또한 그 변화는 항상, 개인에게 무언가 '강요'를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 개인이, 세상의 강요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은 사회 내에서 생존가능성을 높게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살아남고 싶으면 변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어떠한가. 현대에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과거 그 또는 그녀에게 주어진 세상을 헤쳐나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가운데 생겨난 '무엇'은 지금과 앞으로의 생존에 대한 버팀목이자 나침반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적응'이나 '수용'으로 요약될 수 있는, '생존을 위한 변화'는, 결코 쉽지 않은데, 이는 과거의 가치관으로서 현대의 변화는 항상 '어리석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절대적인 가치관은 항상 변해왔기에, 결코 절대적일 수 없긴 하지만, 그 시대에서 만큼은 '절대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그 가치관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개인도 마찬가지, 자신의 가치관은 자신이 '믿고 있기에', 항상 절대적이다. 결국, 가치관은 항상 시대의 변화를 '틀렸다'라고 여기기에, 둘의 만남은 항상 '상충'으로 표현되며, 가까스로 생겨난 '화해'는, 때로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느끼게 해줄 수도 있다. (물론 둘의 관계가 '다툼'으로 번지기도 하며, 그것은 한 시대의 역사를 이루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 그리고 외부의 요구가 상충됨으로서 흔들리게 되는 것이, '생존문제' 하나일까? '변화에 맞춰 나가지 못했다'라는 것은, 맞춰 나간 사람과의 '괴리'를 낳고, 타인과의 '거리'는 더욱 넓어진다. 이로 인해 한 인간이 겪어야할 '외로움'과 '슬픔'은 당신도 약간이나마 느껴왔던 것일터.
한 개인이나 사회가 갖고 있는 '뿌리', 그리고 광기어린 세상이 요구하는 '변화', 그 가운데 생겨나는 '어리석음'이라는 인식과 상충은, 너무도 뻔한 현상이지만, 정답도, 타당한 전례도 없는, 오래되고 오래된 문제이다. 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여러의미에서의 '죽음', 그리고 변화함으로서 생겨버린 '상실'. 살아 있으려면 쫓겨야 하고, 도망가지 못하면 목이 잘려 메달려 있어야하는, 열네갈래 뿔의 사슴을 보며, 웃음과 눈물 짓는 사람은 단지 엘리자베스 2세만은 아닐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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