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국민 말을 무조건 들어주지는 않는다. 아니,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국민 말에는 양쪽 귀를 다 막고 아예 신경 끄려고 작정을 한 듯 보인다. 5천만 국민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아니고, 대표라고 뽑은 분들이 대신 책임지고 나라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생길 수도 있지만, 국가라는 거대한 사회의 틀 속에서 국민들이 생각조차 못하는 온갖 거대한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결국은 국민들의 뜻과는 점점 멀어지는 길로 나아가다 보면,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위치에 있는 것도 참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나라 사정상, 예산 관계로"와 같은 식상한 변명들 앞에서, 국민들 한명 한명의 한숨은 어디로 흘러가지도 못하고 그저 한 곳에 고여 썩어갈 뿐이다.
인륜을 거스르는 범죄 앞에서 나라가 희생자들의 편에 서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그런데 때론 이런 최소한의 의무에도 충실하지 못한 국가가 국민들을 서럽게 한다.(요즘은 가해자마저도 인권이 있다면서 보호하려는 마당에 그게 제대로 되겠냐만은) 영화 <그놈 목소리>는 "공소시효"라는 올가미에 걸려 이제 나라에선 해결 안해도 그만인 사건이 되어버린 1991년 이형호군 유괴사건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영화는 그런 법적 제도의 훼방과는 상관없이, 당한 이들의 분노와 슬픔은 시간이 얼만큼 지났든 여전히 뜨겁고 처절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고 증언한다.
때는 1991년 여름. DBC 방송국에서 9시 뉴스 진행을 맡고 있는 인기 앵커 한경배(설경구)는 기자 시절부터 부정부패를 과감히 캐내고, 앵커로서도 항상 뼈 있는 말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아내 오지선(김남주)과 하나뿐인 9살배기 아들 상우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던 그에게 어느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하나뿐인 아들 상우를 어떤 의문의 남자(강동원)가 데리고 있다는 것. 전화를 걸어온 그 남자는 경찰에 신고하면 상우의 목숨이 위험할 것이라 경고하며 현금 1억원을 요구한다. 하지만 어느덧 김형사(김영철)를 비롯한 경찰들이 경배 주변에 상주하며 수사를 시작하고, 그런 가운데 경배와 지선, 그리고 그놈은 수차례 만날 뻔한 순간을 스쳐간다. 아들의 생사를 알 길이 없는 부모의 속은 바짝 타들어가는 가운데, 지능이 보통이 아닌 듯한 그놈은 하루에도 몇번 씩의 협박전화로 경배와 지선, 그리고 경찰들을 완벽하게 갖고 놀기 시작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주인공들의 직업이나 이름만 바꾸고 구체적인 사항까지 모두 실화 그대로 옮겨온 영화이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가 시덥지 않으면 그만큼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배우들의 연기는 놀라울 만큼 나무랄 데가 없었다. 상우의 부모인 한경배와 오지선 역의 설경구와 김남주의 연기는, 자식잃은 부모의 창자 끊어지는 마음을 표현하기에 부족할 데가 없었다.
설경구는 몇몇 영화에서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었던 "소몰이 창법" 연기의 압박감을 싹 걷어내고 자식을 잃어버린 채 안절부절못하고 속만 천갈래만갈래 찢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모의 무기력한 심정을 담백하게 잘 보여주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뒤에 숨겨진 억만금의 슬픔으로 인해 한없이 힘들고 지친 모습을 보여주다, 마지막에 가서 분노에 가까운 그 슬픔을 화산처럼 뱉어내는 그의 연기는, 역시 연기의 짜고 쓰고 매운 맛을 제대로 보여줄 줄 아는 배우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6년만에 연기활동을 재개한 김남주 또한, 그동안 활동을 너무 오래 쉬어서 연기력이 굳어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화장기도 별로 없이 애타게 상우를 찾으려 쓰레기통도 수차례 뒤지고, 빗속에서 정신을 잃고, 가슴을 때리며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부모의 슬픔을 적극적으로 전달해주기에 충분했다. 같은 부모의 심정에서 더욱 애착이 갔다는 그녀의 얘기처럼, 이번 영화에서의 연기는 지금까지 그녀가 출연한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힘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연기였다.
강동원의 목소리 연기에도 그저 감탄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핏기와 인간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 철저히 지능적인 분위기와 차가운 냉소로 가득한 그의 말투는 이전에 그가 나왔던 어느 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정말 정나미 뚝뚝 떨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목소리만으로 그런 느낌을 전해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그런 점에서 정말 노력하는 배우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이 역할은 마땅히 지탄받아야 할 실제 범인을 대신한 역할이라 정나미가 뚝뚝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역할인데, 아직은 "청춘스타"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그가 이런 연기에 용케 도전하고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것이 그저 기특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이와 함께 경배와 지선 부부를 돕는 경찰의 일원인 김형사 역을 맡은 김영철 씨의 연기도 참 맛깔스러웠다. 결코 웃으면서 볼 수 없는 이 영화 속에서 그나마 가벼운 분위기를 담당하며 능청스런 푼수 형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아들을 한없이 위하는 훈훈한 부성애가 어느덧 가슴을 데워주는 참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죽어도 좋아>는 보지 못했지만 <너는 내 운명>을 통해서 박진표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촌스러울 만큼 화려한 기교를 사용하지 않는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복잡하거나 수준이 높지 않다.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리면서 거기에 끈질기게, 하지만 진실되게 호소하는 것이 박진표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너는 내 운명>에서 그런 감독의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실화에서 어느 정도 모티브만 딴 <너는 내 운명>과 달리 실화를 영화로 온전히 옮긴 <그놈 목소리>에서는 그런 그의 면모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영화는 애초에 "현상수배극"을 표방했다. 은근슬쩍 경각심만 느끼게 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범인이 잡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흔히 유괴사건 하면 떠올릴 수 있는, 헐리웃 영화 <랜섬>과 같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스릴러의 긴장감 같은 것은 애초에 관심이 없다. 상우가 유괴당한 이후 부모들이 겪는 죽음보다 끔찍한 나날들을 그저 하루 이틀 쫓아갈 뿐이다. 극동극장, 김포공항 국내선, 63빌딩, 남산케이블카, 롯데월드 등 사건에 등장했던 여러 장소들도 가리지 않고 그대로 영화 속에 집어넣었다. 상업영화로서의 화려한 연출 기교는 없이, 다큐멘터리처럼 하루하루 사건의 진행 상황을 따라갈 뿐이다. 아주 사람 피를 말리는 협박 전화가 반복적으로 울리고, 거기에 휘말려 하루에도 몇번씩 이곳저곳을 왔다갔다 해야 하는 부모들의 애타는 모습이 그저 그대로 보여질 뿐이다. 극적 장치를 일부러 배치하지 않고 철저히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때문에 유괴라는 소재에서 느낄 법한 스릴과 박진감같은 것을 기대하고 보신다면 적잖이 실망하실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남는 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참담하고 막막한 마음, 바로 그것이니 말이다.
그만큼 영화는 유괴라는 소재를 극을 흥미롭게 하는 소재 정도로 쓰지 않았다. 1991년 실제로 일어났었던 사건을 그대로 극화한 것이고, 그 사건이 어떻게 매듭지어졌는지도 이미 드러났었기 때문에 그 매듭지어진 결과 또한 그대로 나온다.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다. 이 영화 속에서 유괴란, 유괴범과 부모들 간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소재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 인간이라면 저질러서는 안될 천인공노할 죄악이란 명목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정은 오락적 쾌감이 아니라, 암울한 슬픔과 분노이다. "왜 이렇게 불편해?"가 아니라 불편한 게 당연한 거다.
이런 꾸미지 않은 감정의 촉발은 감독이 의도한 대로 영화 속 상우 부모의 상황에 관객으로 하여금 그대로 몰입하게 하는 확실한 위력을 발휘한다. 자신들의 몸을 제대로 혹사시켜 가며 펼치는 배우들의 연기와, 진득하지만 끈질기게 부모들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영화의 구성은 상우 부모의 상황에 어느덧 감정이입이 되게끔 만든다. 이렇게 생긴 감정을 토대로 영화를 따라가다 보니, 특별한 극적 기교를 부리지 않아 영화가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다 하더라도 상우 부모들의 마음처럼 절로 두 손을 꽉 쥐고 지옥과도 같은 그들의 기록에 어느새 빨려들게 되더라. 그런 감정 속에서 영화의 절절한 감정을 함께 느끼던 관객에게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본연의 목적을 확실히 보여줌으로써 그동안 관객이 느낀 감정이 어떤 적극적 행동의 불씨로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단초로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지만 꾸밈없이 정직한 전개로 부모들의 감정에 어느새 빠져들다 보니, 마지막에 직접적으로 밝히는 영화의 의도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서 활개치고 있을지 모를 그놈을 잡기 위한 노력과 함께, 감독은 두 가지 대상을 향한 분노를 이 영화를 통해서 표출하고 있다. 그 분노 또한 은근한 암시가 아닌 지극히 직접적이고 그래서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분노다. 첫번째 대상은 당연히 "그놈", 범인이다. 사람을 완전히 질리게 하는 87차례의 협박전화를 통해 범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단지 자식이 살아있기만을 고대하는 부모의 마음을 신난 듯 갖고 논다.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는 부모들의 말 한마디에 "배짱 좋으십니다"와 같은 비꼬는 말이나 해대고,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부모들의 심정 앞에다 대고 "상우 죽길 바라죠?"와 같은 말을 내뱉으며 부모들을 완전히 사지로 내몬다. 미행을 따돌린답시고 부모들로 하여금 이곳저곳을 왔다갔다하게 만들며 사람 바보만드는 건 양반이다.
결정적으로 참을 수 없는 그의 행동은, 그렇게 원하던 돈 2억을 갖다주고도 납치한 아이는 유괴 44일 만에 차가운 주검으로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납치된지 얼마 전 살해된 게 아닌 유괴 하루 뒤 일찌감치 살해된 주검으로 말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루에 골백번 자신들을 책망하며 살아있는 줄로만 알았던 자식을 기다렸을 부모들의 애끊어지는 심정을 완벽하게 농락한 것이다. 그것도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9살 꼬마를 대상으로 해서. 그러면서도 톤 하나 안 변하면서 차갑게 한마디 한마디 툭툭 던지는 그의 목소리는, 정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노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경배와 지선의 자식을 향한 사랑은 물론, 또래의 아들을 둔 김형사의 부성애까지도 범인은 싸늘하게 비웃는다. 부모들은 그렇게 믿어오던 하나님, 예수님마저도 원망스럽기 짝이 없을 만큼 삶의 끝과도 같은 심정임에도, 범인은 그걸 즐기는 듯하다. 이렇게 인간으로서 차마 할 엄두가 안날 범인의 행동들을 영화는 열거하며, 누구보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들을 완전히 무기력한 바보 천치로 만들며 가지고 논 범인에게 순수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영화를 보는 우리의 가슴에도 그대로 불을 지르고 말이다.
두번째는 찢어지는 부모의 마음은 이해하지 못한 채 언밸런스하게 나가는 거대 사회의 모습이다. 경찰에 신고해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건 당연한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유괴범의 요구에 경찰에 신고할 수 없다는 건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경찰 있소 하고 대놓고 광고하는 듯 눈치 없는 수사를 벌이는 경찰들의 모습은, 안그래도 바싹 마르는 부모들의 심장을 더 쪼그라들게 만든다. 자식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중요한 부모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한 채 공개수사를 종용하고, 부모들에게 혼란스러운 요구만 하는 수사팀의 모습은, 부모들을 더욱 지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분노의 대상으로 영화 속에 자리한다.
영화 속에서 비쳤던 이런 사회의 무심함은 비단 영화 속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자막을 통해 영화는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이미 끝났음을 알리면서, 현재에도 제도의 싸늘한 무관심이 서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것은 즉, 이제는 범인이 잡히더라도 형사처벌은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범인이 잡혀도 풀어준다는 뜻이다. 어린 아이를 유괴한 것도 모자라서 살해까지 했는데 그 범죄의 공소시효가 15년이라. 15년 지났으니 이젠 용서해준다는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용서했는가. 희생당한 아이의 부모들이 멀쩡히 살아숨쉬고 있고, 그 상처도 한 치도 희미해지지 않은 채 여전히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데. 우리가 용서 안했으나 피해 당사자는 용서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어도, 직접 당한 이들이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누가 그를 용서했단 말인가. 어차피 지금 잡는다고 해도 인력낭비라는 시덥지 않은 제도의 변명 아래,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꼭 잡고픈 부모의 마음은 강제로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뼈까지 파고드는 상처도 15년이면 지워질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사회의 무심한 제도 앞에서 또 한번 좌절해야 할지도 모를 이들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단지 범인을 잡는다는 목표를 넘어서, 국민의 아픔을 모른 체 하는 제도의 모순까지 뜨겁게 꼬집고 있는 것이다.
영화 외적인 사건을 영화에 들여왔고, 영화의 궁극적인 목표 또한 영화 안에서만 머물지 않기 때문에 영화 자체만 놓고 냉정하게 평가를 할 수는 없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건, 그런 현실을 향한 치열한 분노와 아픔이 영화를 통해서 진득하지만 끈질기게 보는 사람의 가슴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억지로 사람을 선동한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직접 나설 수 있도록 밀어준다고나 할까. 상업적이고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는 오해를 사더라도 상관없다. 이 영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에 대한 진심어린 분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고, 이 영화를 통해 전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머릿 속에 똑똑히 그놈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라도 꺼내지 못한 순수한 열정을 국민들로 하여금 꺼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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