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이지만, 중학교 때 단짝 친구와 약속한 것이 있었다. 나는 프랑스어, 너는 독일어를 배워서 각 나라에서 3개월씩 배낭여행을 해보자고.. 무거운 배낭은 좀 곤란하니 창문 너머로 에펠탑이 빼꼼히 보이는 반지하방을 얻어 거기를 기점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는 자유로운 여행을 꿈꾸던 우리들은 각기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고, 그 뒤로 간간히 연락하다가 지금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지 4년 정도 지나버린 사이가 되었다. (친구는 나와의 약속 때문인지 그 과목이 더 쉬워서였는지 몰라도 고등학교에서 독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해 어느 정도 공부했다고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불어라곤 간단한 인삿말과 화장품 용어 정도 밖에 모른다;;)
그때 내가 동경하던 것은 실상은 패션과 낭만의 도시 파리가 아니라 불어였다. 길에서도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는 연인들이 아니라 그들이 불어로 속삭이는 사랑의 언어들을 가까이서 듣고 싶었다. 늘 조곤조곤 말하고, 아무리 화난 말투여도 귀에 걸리지 않고 냇가에 던진 조약돌처럼 퐁당퐁당하는 그 말이 좋았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나의 불어 사랑을 꺼내놓은 이유는 이 영화가 불어처럼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헐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의 과장된 상황과 요란스러움은 없어도 불어처럼 나즈막하면서도 퐁당거리는 사랑 이야기가 딱 내 취향이었다. 가장 화려한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심플한 사랑을 하는 주인공들도 너무나 사랑스러웠으며, 거기에 또 내가 불어만큼이나 편애하는 샹송과 브랑쿠시와 피아노 연주가 나와주니 내겐 과연 '완소!'를 외칠만도 한 영화였다.
하지만 원제 Orchestra seats에 비해 조금은 상투적인 제목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사랑해, 파리'를 생각하니 왠지 묻혀지는 진주가 되어버릴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보고는 싶지만 마땅히 같이 갈 사람도 없고 극장에서 이런 잔잔한 영화를 보긴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대로 하라. 끝내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해 혼자 비디오나 DVD로 보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다가 벌떡 일어나 파리행 티켓을 끊으러 갈 용기가 있다면 말이다. 뭐, 그것도 썩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모험으로 멋진 인생을 얻었다며 제시카의 할머니도 적극 권장하고 있지 않은가? ㅎㅎ
덧) 내 뒤에 앉았던 당신! 쟝의 병원에서의 연주 장면이 끝나고 조그맣게 박수를 치려다가 움찔하고 이내 그만둔걸 알아요. 사실은 나도 박수를 치고 싶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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