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은 어른들이 보기에는 유치하고 조악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들의 소꿉놀이는 유치한 애들 장난이니까. 하지만 그시절의 소꿉놀이는 그들에게는 상상력의 나래가 펼쳐진 세상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집을 세우고 밥을 만들고 그들만의 생활을 일시적으로 꾸려나간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있다는 믿음이며 그 믿음을 지탱하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 지니는 순수한 상상력이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사실 아동을 위한 성장동화에 가깝다. 다만 그 동화적인 상상력이 판타지의 상상력을 뒤집어썼을 뿐이다. 실제로 극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중간계의 비현실세계와의 조우가 아니라 아이들의 상상력안에서 완성되는 가상공간의 창조다.
어느 이른 아침, 아버지가 나가시는 모습을 확인하고 어디론가 내달리는 아이. 아이는 쉬지 않고 내달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제시(조쉬 허처슨 역)는 무뚝뚝한 아버지를 제외한 어머니와 여자 형제들 사이에서 유일한 남자아이이다. 집안에서도 조용한 제시는 학교에서도 눈에 띄지 않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아도 대응하지 않으며 평범한 일상을 보낼 뿐이다. 어느날과 다를바없는 학교생활 중 레슬리(안나소피아 롭 역)가 전학오면서부터 그의 일상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제시는 레슬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레슬리는 어린 아이지만 영민하고 상상력을 현실화시키는 능력이 강하다. 그녀의 상상력은 떄론 망상처럼 위험해보이기도 하지만 어린 나이의 순수한 망상은 사실 그 나이에 걸맞는 투명함을 지닌다. 하지만 레슬리가 제시에게 다가가는 것은 두 아이가 또래라는 공통점때문만은 아니다. 레슬리는 제시의 그림을 통해 잠재된 제시의 창조적 상상력을 발견한다. 그것은 제시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허구적인 창조력과도 일맥상통하고 그 둘은 그렇게 공통된 관심사로 묶이게 되는 셈이다.
제시와 레슬리가 우연히 찾게 된 숲은 레슬리에 의해 테라비시야로 명명되고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세우며 추억들 쌓기 시작한다. 테라비시야가 자신들의 왕국임을 선포하는 아이들의 상상력은 영상을 통해 현실화된다. 레슬리의 끝없는 상상력에 난감해하던 제시도 결국 동심의 날개를 펴고 둘은 자신들이 세운 왕국을 함께 건설한다.
극에서 두 아이는 가상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들은 괴물처럼 변한 다람쥐와 거대한 독수리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바람처럼 내달리고 로봇처럼 단단해진 주먹으로 그들을 내친다. 그리고 거대한 발을 가진 거인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그들의 상상력 속에서 실현된 허구들인데 그것이 영상으로 실현되는 광경은 우리가 그들의 상상력을 염탐하게 되는 행위와도 같다. 하지만 이것이 거북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어린 아이들의 소꿉장난 속의 가상공간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착시현상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관객의 몫인데 그 어린 아이들의 풍부한 상상력이 창조한 환타지의 세계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이 역시도 동의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중점이 되는 것은 어린 소년의 성장과 상실의 극복에 있다. 사실 판타지의 외피를 둘렀지만 영화는 한소년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마치 "판의 미로"를 생각나게 하는데 한소녀를 통해 발견되는 그 허구적 세계가 그 소녀가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창조한 세계이자 현실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소녀의 판타지적 갈망임이 이해되었을 때 눈물샘이 자극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제시가 레슬리를 통해 발견한 신세계가 그녀의 상실을 통해 부정되고자 할 때 소년의 아픔이 전이된다. 어린 나이에 겪게 되는 만남과 이별의 정서속에서 건져지는 투명한 웃음과 눈물의 과정은 누구나 겪었던 유년기의 추억을 상기시키게 한다. 그리고 그 소년의 아픔 마음이 숲을 방황하게 하고 그 마음이 무뚝뚝하던 아버지에 의해 어루만져질 때 소년의 마음에 생채기가 아물어가고 그 끝에 남아갈 추억같은 흉터가 소년에게 인생의 보석같은 선물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게 한다. "판의 미로"는 유년의 판타지가 어른들의 현실에 의해 짓밟혀버림에 연민을 느끼게 한다면 이 작품은 유년의 판타지가 순수하게 순기능을 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멸하고 생성되는 과정을 세심하게 묘사한다.
동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소재의 근본처럼 유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결코 유치하다거나 폄하할 수 없는 가치를 동반한다. 유년의 관문을 지나 성인이 된 이들에게는 동심의 순수함과 성장통의 아련했던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유년의 소재를 통하고 있지만 영화의 맥락은 오히려 성년의 눈높이를 자극한다. 다만 그것은 그 순수한 판타지의 세계를 동의할 수 있는가라는 제반조건을 동반한다. 이 영화속의 판타지가 현실과 무관한 중간계처럼 다른 차원의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염탐으로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즐길만한 것이 될 수 없다. 어린 아이들이 창조한 순수 판타지가 톨킨의 중간계만한 스펙타클을 자랑할리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판타지가 만든 화려한 외양이 아니라 그 판타지의 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 그 자체인것이다. 마치 "판의 미로"의 오필리어가 분필로 벽에 문을 그려냈듯이. 그것은 멀쩡한 성인이라면 거부감부터 느낄 유치함이 될지도 모르지만 극중 대사처럼 마음을 연다면 그 동심의 순수한 전조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추억이 더이상 진행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성인이 되어 각박한 현실안에서 상상력을 빈곤하게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이 행복했던 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쉽게 인정하고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이라는 기준이 폄하하게 만드는 순수한 세계. 그 세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분명 적당한 충족감을 주고 따뜻한 감성을 심어줄만하다. 분명 우리가 동심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나이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라는 체면에 얽매여 그 시절의 감성에 등을 돌리기 떄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리가 더이상 돌아갈 수 없는 그 아련한 세계에 대한 향수처럼 그립다. 유년시절. 그 되돌릴 수 없는 판타지를 말이다. 어린시절 상상의 다리를 건너 테라비시야에 도착했던 추억이 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훈훈한 이야기가 될법하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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