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문화, 혹은 문명을 제3자의 입장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만인의 보편적 가치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닌 이상, 세상의 많고 많은 문화와 문명은 그 지역이 갖고 있는 꼿꼿한 의식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그 문화의 의미를 경험해 보지 않은 입장에서 단지 외부인의 시각으로써만 남의 문화를 논평한다는 것은 꽤나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일이다. 프랑스의 한 여배우가 우리나라의 "개고기 문화"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걸 두고 우리도 그에 못지 않게 반발했듯이 말이다.
더구나 급력이 대단히 큰 문화 상품에다 그런 목소리를 일정량 집어넣는다면 그건 더욱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최근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걸출한 배우로서의 모습보다 감독으로서의 모습을 더욱 보여주고 싶어하는 듯한 멜 깁슨이 그런 용감한(혹은 무모한) 일을 벌였다. 잠시 여행이라도 가서 짧게나마 직접 경험해 본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접한 거라곤 단지 글이나 그림 정도에 불과한 "마야 문명"에 대해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아포칼립토>는 다른 뒷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보면 꽤 즐길만한 오락영화인 것이 분명하지만, 뒷배경을 살포시 갖다놓고 생각해보면 마냥 즐기기만은 좀 그런 영화다.
마야 문명의 한가운데에서 "표범 발"(루디 영블러드)이라는 청년은 친구들과 즐겁게 사냥하고, 든든한 아버지와 아내와 아이들과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며 평범하지만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행복도 잠시, "표범 발"이 속한 부족들과는 생판 다른 액세서리들을 하고 있는 침략자 부족들이 마을을 습격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어린 아이들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채 멀쩡한 남녀들은 침략자들에게 붙잡혀 먼길을 끌려간다. 이 와중에 "표범 발"은 아내와 아이들을 간신히 대피시켜 바위 밑 깊은 구덩이에 피신시키고 곧 돌아오마 약속하지만, 그만 다른 부족민들과 함께 침략자들에게 끌려가는 바람에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먼길을 거쳐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돌로 쌓은 높은 탑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또 다른 공동체. 그러나 여기서 이들이 맞닥뜨리는 것은 끔찍한 학살이다. 계속되는 악재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 멀쩡히 살아있는 이들을 제물로 하나둘씩 바치는 것. 참혹한 학살에 하나둘 씩 희생되는 가운데, "표범 발"은 뛰어난 순발력과 민첩성으로 간신히 탈출한다. 그러나 여간 끈질기지 않은 침략 부족의 추적자들이 "표범 발"을 뒤쫓기 시작하고, 가족을 되찾기 위한 "표범 발"과 추적자들 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계속되는데.
미국과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 유창하게 영어를 쓴다는 핀잔을 듣는 대신에 미국 영화임에도 과감하게 현지 언어를 100% 사용함으로써 사실성을 기하는 멜 깁슨의 이런 "극리얼리즘" 방식은 전작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도 적용된 적이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때에는 그나마 짐 카비젤, 모니카 벨루치와 같은 유명배우들이 출연해서 그 와중에도 낯선 느낌이 좀 덜했지만, <아포칼립토>의 경우는 거짓말 안하고 안면 있는 배우들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몇몇 주요 인물들은 그 얼굴이 그 얼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멜 깁슨의 의도였을, 미국 영화같지 않은 생경한 느낌이 꽤 잘 와닿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영화는 시작 후 조금만 집중하면 그런 생소한 느낌이 말끔하게 사라진다. 감독의 의도가 온전히 먹히지는 못한다는 거다. 그 이유는, 생소한 배경이나 인물들, 언어와는 별개로 영화의 만듦새가 너무 매끈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매끈하다는 건, 영화의 완성도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나온 헐리웃 영화들에서 흔히 보아 온 정형화된 모습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의미다. 배우들이 주고 받는 대사나 표정 연기, 행동들은 그들이 구사하는 영 생소한 언어만 제외한다면 여느 헐리웃 영화와 딱히 구분되는 것이 없다. 두드러지는 능력을 지닌 영웅과 그가 겪는 뼈아픈 시련, 그에 대한 복수와 가족애와 같이, 이야기 구조 또한 기존 "히어로" 영화들에서 찾을 수 있는 형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특성이 한편으론 영화의 오락적 요소에 훨씬 더 잘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전혀 익숙치 못한 배경과 언어 사이에서 혼란스럽다가도, 익숙한 이야기 구조나 표현 방식에 금방 쉽게 적응을 하고 영화가 주는 오락적 요소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상업영화로만 놓고 봤을 때 그 오락성은 능히 인정해 줄 만하다. <브레이브하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부터 보여줬던 멜 깁슨 "감독" 특유의 노골적인 비주얼은 말할 것도 없고(비위 약한 사람이면 능히 눈 질끈 감고도 남을 비주얼들을 보여주며 한눈 팔 것 없이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그의 능력이란) 특히나 "액션 어드벤처" 장르를 표방하는 이 영화는 그에 걸맞게 나무들과 위험한 동물들이 빽빽히 들어선 정글 속에서 쉴새없이 펼쳐지는 추격전과 주인공의 용기와 두뇌플레이로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조성하며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숨막히듯 마구 우거진 정글의 모습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한 탑 주변의 광활한 풍경 등, 규모 면에서도 나무랄 데 없다. 때문에 다른 뒷배경 생각하지 않고 오락영화로서 이 영화의 가치를 판단한다면, 충분히 상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멜 깁슨 감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어쩌면 이것이 감점 요소가 될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의도를 자막을 통해 분명히 드러낸다. "문명은 스스로 붕괴되기 전까지는 정복당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이 영화 전체를 끌고 나가는 일종의 전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용구의 경우는 영화에선 항상 뭔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 무게감 있게 나타나지 않던가. 이런 우리의 경험상 이 문구 또한 영화를 보기 시작한 우리의 뇌 한 구석에 일종의 큰 전제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 뒤로 어쩔 수 없이 들기 시작하는 생각은, 저렇게 잔인한 학살을 일삼는 저 문명의 모습은 스스로의 붕괴를 초래하고 있는 모습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영화 속 마야 문명을 또 다른 하나의 특기할 만한 문명처럼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살벌하고 뭔가 음침한 구석이 있는 문명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도, 마야 문명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이미지인 "독자적 문명으로서의 체계성"과는 거리가 먼, 야만적인 오지 원주민들의 모습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 결과 침략자들로 벗어나려는 "표범 발"의 모습이, 마야 문명 자체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것처럼 착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차라리 이 영화가 다른 어떤 사상적 메시지를 담지 않은 채 100% 순수한 오락영화로 나아갔다면 그나마 더 보기 편했을지도 모른다. 이집트 문명을 배경으로 롤러코스터같은 구성으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이라> 시리즈처럼 해당 문명에 대해 그 어떤 평가도 배제한 채 말이다. 그런데 <아포칼립토>는 순수한 오락영화를 넘어서, 마야 원주민들의 삶 속에 외부인의 문명관(어쩌면 감독 자신의 것일지도 모를)을 은근슬쩍 집어넣는다. "내부의 붕괴" 운운하는 전제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는 영화 속 마야 문명을 단지 영화 속에만 오롯이 존재하는 문명 그 자체로 보기 어려워진다.
이런 부분은 결말에 가서 그 의도가 더욱 두드러지는 듯하다. 마지막 스페인의 함대들이 원주민들이 있는 섬에 당도하는 모습은, 마치 몰락의 위기에 빠진 원주민들을 살리기 위한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마야 문명 내부에서의 혈투가 실컷 지나가고 난 뒤에 유유히 나타난 이 함대들은, 독자적으로 번창했던 문명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종속시키려 했다는 시선에 은근히 시치미를 뚝 떼는 것만 같다. 영화 시작부에 뜨는 인용구가 머리 속에 겹치면서, 멀쩡하게 잘 나가던 문명을 서구 세력이 나서서 파괴한 게 아니라, 내부에서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 있었으니 알아서 몰락한 거라고 설명하는 듯하다. 결국 서구 세력의 침략의 책임은 별로 없을 수 있다고 은근슬쩍 얼버무린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고, 때문에 누구도 쉽게 그 실체를 단정지을 수 없는 과거의 문명에 대해서 이렇게 섣불리 폄하하려 하는 것은 꽤나 위험한 생각임엔 틀림없다.
앞서 얘기했듯, 이 영화가 차라리 시작부의 인용구와 같은 문명 의식은 말끔히 잘라내고, 배경도 스페인 함대가 들어오기 직전 몰락의 기미를 보이는 말기가 아니라 여느 때와 같은 중기의 한 때로 설정했더라면, 적어도 이 영화가 오락영화를 표방한 이상 그 어떤 사상이나 의식의 압박 없이 경쾌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대담하면서도 한편으론 무모할 수 있는 문명관은 영화가 아무리 즐거움을 준다고 하더라도,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는 분명히 즐거운데 왜 이렇게 뒤가 찜찜하지?" 하는 느낌의 불편함을 가져다 줄 위험이 있다. 영화라는 게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 상품인지라 즐거움이 가장 우선되는 덕목이긴 하지만, 그 즐거움 뒤에 꽤 위험한 생각이 담겨 있는 건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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