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박진표 감독은 전작 '죽어도 좋아'와 '너는 내 운명'에서 파격적인 소재와 편견을 깨는 결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 신작 '그 놈 목소리'에서는 아예 우리나라 3대 미결사건이라는 이형호 어린이 유괴사건을 소재로 채택했다. 이는, 박감독이 '너는 내 운명'을 만들기 한참 전인 2002년에 이미 영화화를 결정하고 설경구의 캐스팅까지 마친 상태였으니, 이 영화에 대한 박진표 감독의 집념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1991년 '그것이 알고 싶다' PD를 할 때, 이 사건을 취재하였기 때문에 이전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박진표 감독 특유의 '감정에 호소하기' 또한 확실하게 유효 할 수있었던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두 주연배우의 연기이다. '박하사탕'부터 시작하여 '공공의 적', '역도산', '광복절 특사', '열혈남아'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단연코 연기를 가장 잘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설경구의 연기는, 정말이지 놀랍도록 소름끼쳤다. 개인적인 평가지만, 이번 영화에서 설경구가 보여준 연기는 이전까지 보여줬던 설경구 연기의 총 집합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냉철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뉴스 앵커에서 자신의 아이가 유괴되고 협박 전화를 받으며 고통받는 44일 동안, 진정한 '아버지'의 연기를 펼친 설경구의 연기는 앞으로 두고두고 화자가 될 만 했다. 특히, 말투 하나하나와 눈빛 하나까지. 정말이지 소름이 끼쳤는데, (특히, 회전목마 씬에선 한 쪽 동공은 중앙으로 모이고, 한 쪽 눈은 살짝 뜨면서 동공이 왼쪽으로 쏠린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마지막 뉴스 장면이었다. 어떻게 보면 작위적인 장면이긴 하지만, 난 이 장면에서 울었고. 설경구의 연기는 환상이었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김남주의 연기도 압권이었다. 전작 '아이 러브 유'에서 최악의 연기로 악평에 시달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번 영화에서 김남주의 연기는 '최고'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멋진 어머니 연기로 생각하고 있었던, '말아톤'의 김미숙 연기 그 이상이었다. 박진표 감독이 '김남주의 캐스팅을 보고 전부 의아해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김남주의 재발견에 관객들은 분명 놀랄 것이다.'라고 한 것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살인의 추억과 비교하는 기사나 네티즌들이 많은데, 사실 이 영화는 살인의 추억과 많이 다르다. 물론, 살인의 추억과 그 놈 목소리가 무기력한 그 시대의 시대상을 잘 반영한 작품이라는 데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형사'에 관한 이야기었다면, 그 놈 목소리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부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살인의 추억이 사건 자체보다 사람에 관한 냄새를 풍겼던 반면, 그 놈 목소리는 사람보다 사건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의 추억때와 같은 열광적인(아직은 모르지만,) 반응을 이끌어 내진 못 할 것 같다. 이것이 어찌보면 이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인데, 너무 사건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지루해 질 수도 있고, 또 관객이 불편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박진표 감독은 이 영화에서 '사람'중심을 그려낼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이 영화의 결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경배가 생방송 중에 유괴당해 죽은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하고, 이 음성을 잘 들어주십시오라고 한 후 나오는 실제 범인 음성.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오는 범인의 몽타쥬와 아이의 유골. 이 모든게 '미치도록 잡고싶습니다'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박진표 감독의 연출 의도이다. 물론, 이런 직설화법이 너무 강조되있다 보니 영화적 재미는 떨어지고 재현 드라마같이 영화가 전개된다. 하지만, 박진표 감독 영화는 애초에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가 아니다. 노부부의 성생활, 에이즈 환자와의 사랑. 이런 소재는 결코 대중적인 소재가 아니다. 또한, 이 두 영화 모두 대중에 초점을 맞추기 보단 있는 그대로 소재를 풀어내는 형식을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도 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지, 이 사건으로 당사자와 사회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 영화에서 범인은 아이를 유괴 하루만에 죽였다. 즉, 범인은 돈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범인이 아이를 유괴한 것은 한경배와 오지선을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처럼 보인다. 위에 언급했듯이, 냉철하고 이지적이며 카리스마있고 권력을 쥐고 있는 한경배를 철저히 파괴하기 위해 유괴라는 수단을 사용한 것이다. 범인은 부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친한 친구마저 배신해버리는 인간이 아이의 유괴로 인해 너무나도 작아져버리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슈퍼맨 넥타이를 입으며 화려한 시절을 보내던 한경배는 아들의 슈퍼맨 피규어를 보면서 절망하게 되고, 마지막 방송 때 다시 슈퍼맨 넥타이를 입으면서 작아져버린 자기를 표현해낸다. 이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화려한 시절을 소망하는 한경배의 바램도 들어있다고 보여진다.
이 영화는 너무나도 답답하다. 내가 이 때까지 살면서 약 600~700편정도의 영화를 보았지만, 이런 영화는 정말 처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심장이 벌렁벌렁거리면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실제입니다.) 물론, 엔딩이 너무 충격적이고 대단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였지만, 영화를 보면서 답답했던 마음을 한 순간에 진정하려고 해서 이렇게 힘이 쫙 풀렸던 것 같다. 영문도 모른채 아이가 유괴되고, 계속 해서 오는 협박전화에 아무런 수를 쓸 수 없는 부모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이것이 박진표감독이 추구했던 연출의도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강동원의 소름돋는 음성은 사람을 너무나도 답답하게 하였다. 또, 영화에서 계속해서 내리는 비와, 짜증날 정도로 무더운 날씨는 모두 그 답답함을 유발하는 요소가 되었다. 내가 이 때까지 본 영화 중 가장 답답했던 영화였던,(사실, 답답하기보다 우울했다.) 바그다드 카페를 아주 '간단히' 능가하는 답답함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니다. 박진표감독이 영화를 찍을 때 마다 자신의 영화를 다섯 글자로 정의하는데, 이 영화는 '현상수배극'이다. 즉, 단순히 이 사건을 재조명하고 범인을 현상수배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장르를 스릴러로 생각하고 영화를 관람하면 분명 실망 할 수 밖에 없다.(대부분 영화사이트에서 이 영화의 장르를 '드라마'와 '팩션'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몇몇 장면에서 스릴러적 요소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스릴러가 결코 메인 장르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 밖에, 촬영,편집,음향,음악,조명등. 스텝적 요소또한 너무나도 뛰어났다. 특히, '왕의남자', '괴물', '장화,홍련'등으로 한국 최고의 음악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병우의 음악은 너무나도 뛰어났다.(사실, 이병우씨의 음악은 언급하지 않아도 훌륭하다.) 그리고, 임상수감독 사단의 주요 스텝인 김우형 촬영감독과 고낙선 조명감독도 실력 발휘를 멋지게 하였다. 특히, 헨드헬드 촬영과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화려하게 구사하는 김우형감독의 촬영은 정말이지 눈부셨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진표 감독은 이런 스텝을 데리고 마음껏 역량을 펼치지 못하도록 영화가 절제되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또, 봉준호 감독이나 보여줄 거 같은 세밀한 디테일또한 놀라웠다.
물론, 이 영화가 영화적 요소가 부족하다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너무 답답하게 하는 연출때문에, 개인적인 예측이지만 흥행은 잘해봤자 300만 정도 일 듯 싶다.(나도, 두 번 보기는 싫다.) 그러나, 한국영화사상 가장 가장 직설적이고 가장 감정적이고 영화에 가장 분노가 많이 표출된 영화이다. 또, 영화감독이 전해주려는 의도가 100%로 전달되는 영화도 드물다. 즉, 이토록 관객을 지치게 만들면서 '부모가 이렇게 힘들었으니, 우리들은 이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감독의 의도가 잘 드러난 것이다.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확실히 구분되는 영화이겠으나, 분명히 말해 둘 것은 이 영화는 내가 이 때까지 본 한국영화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 하다는 것이다.(어쩌면, 살인의 추억과 비슷한 레벨의 영화라고 생각된다.) 허남웅 기자의 말 처럼, 영화가 할 수 있는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P.S 1- 마지막 뉴스 생방송 장면 때, 한경배가 오열하자 '그냥 어떻게 하는 지 지켜 보자고'라고 말하는 PD는 박진표 감독 목소리입니다.(의미심장하죠.)
P.S 2 - 이 영화는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 최종 결말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놈이 제발 잡히길 바랍니다.
P.S 3 - 강동원이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을 안 알려주는 게 더 좋았을 거 같네요.
20자평 - 실화의 힘+감독의 힘+베우의 힘+스텝의 힘. 무엇을 더 바라는가?!
유의사항 - 미치도록 답답합니다. 너무너무 답답합니다.
비슷한 영화 - 랜섬
이 장면만은 - 마지막 뉴스 생방송 장면 때, 설경구가 보여주는 혼을 담은 4분 동안의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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