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가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이들에게 힘이 빠질만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이 영화는 그 하나의 실례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91년 이형호군 유괴살해사건은 지금까지도 진범을 잡지 못한 미제로 남겨졌고 작년 1월에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수사선상 밖으로 튕겨져버리기까지 했다. 사건은 아직 미결이라는 명제로 해결되지 않은채 진행형으로 남겨진 듯 하지만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라는 암묵적 합의하에 이미 종료된 듯 하다. 마치 휴전 중이기에 한반도는 아직 전쟁 중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듯이.
사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오버랩된다.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덧씌워 만들어진 팩션(faction)이라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이 미해결된 흉악범죄라는 점. 화성에서 벌어진 연쇄 여성 살인 사건을 소재로 했던 '살인의 추억'이 시간 속에서 봉인되어가던 사건을 끌어냈듯 이작품 역시 마찬가지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 화법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살인의 추억'은 영화의 순기능에 충실한 영화다. 사실은 영화의 토양이 되고 그 토양으로부터 허구적인 극이 펼쳐진다. 정적인 시골이 긴박감 넘치는 서스펜스의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규정된 시공간의 심리적 이탈현상은 극적 긴장감의 조임과 풀어짐을 능란하게 조절하는 호흡조절에서 발생한다. 극은 마지막까지 그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며 종래에는 경계가 모호한, 즉 분노인지 경악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불분명한 여운을 남긴다. 결국 이는 현실적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허구의 기능이 보여주는 완벽한 설득력인 셈이다. 마치 해갈되지 못한 갈망과도 같은 여운을 남기는 엔딩은 실로 압권이다.
'그놈 목소리'는 조금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살인의 추억'이 그 실례를 바탕으로 그 사건 자체를 부각시켰다면 '그놈 목소리'는 그 사건과 연관된 인물, 즉 사건의 진행을 형성하는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부각시킨다. 그 사건이 진행되에가는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긴장감의 밀도를 통해 과거의 사건이 보여주는 현상 자체만의 효과를 살리기 보다는 현장에서 사건속을 종횡무진하는 부모의 심정을 관객에게 쥐어짜듯 전달한다. 사실 이 작품은 영화적 순기능보다는 영화가 품은 진실을 전달하는 와전된 순기능에 치중한 듯하다. 특히나 결말에서 보여지는 노골적인 의도는 허구적 극영화의 정서적 흐름을 끊어버리는 우를 범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상응되는 심리적 충격을 안긴다. 사실 극적인 긴장감의 수직적 리듬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심리적인 긴박감의 유희와도 같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심리적 시소게임을 통해 관객의 유희를 보장하는 대신 일관적으로 상승되는 극 속 인물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응시하듯 밀고 나간다. 이는 이 작품의 전달 의도와 맞물린다. 그 진실을 전달하기 전까지 그 상황의 중심에 서 있는 이들의 절실함을 관객에게 전이시킴으로써 종래에 요구되는 사항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전적인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진실이 주는 심리적 중압감을 토대로 그 진실이 다시 부활하고 스크린 위에 아무런 허구적 장치없이 드러나보여야 하는 심리적 근거를 설치하는 것이다.
극은 시대를 은연중에 반영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시대에 대한 비판작용을 위한 의도라기 보다는 극이 보여주는 과거적 사실과 대비되는 세태로부터 파생되는 비통함의 노림수에 가깝다. 노태우 정권 시절,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후 범죄조직의 일망타진은 매일같이 보도되었지만 개구리 소년 유괴사건, 이형호군 유괴살인사건,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엇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다는 것은 꽤나 아이러니하다. -물론 화성연쇄살인사건은 86년부터 91년까지 10차례에 걸쳐 일어난 동일 수법의 범죄지만- 결국 이는 범죄와의 전쟁이 궁극적으로 민생치안이라는 순수한 목적성에서 벗어나 정부가 추진한 프로젝트의 성과를 전시하기에만 급급한 것이 아니었는가라는 논의를 부를 만하다.
영화는 영화가 끌어낸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하기도 하고 영화자체만의 변주를 꾀하기도 한다. 극에서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은 사건 그 자체다. 이형호군의 유괴 후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실제 사건의 발생부터 진행까지의 과정을 사실에 의거해 재현해낸다. 재미있는 것은 '살인의 추억'에서 무력하게 존재했던 과학수사가 다시 한번 등장한다는 것이다. 뛰는 과학수사위에 나는 범인은 경찰의 무능력함을 농락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과학수사까지 동원되지만 범인을 검거하는 것이 아닌 몰아가는 방식의 심증추리는 여전하다. 그것은 수사 일선의 형사들이 지닌 절실한 의지와는 무관한 구시대적인 열악함이기도 하다. 도구는 개편되었지만 방식은 여전히 열악하다. 결국 이는 해결되지 못한 사건에 대한 안타까움을 확장시키는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영화에서 사실과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은 납치된 형호의 아버지인 한경배(설경구 역)인데 실제 이형호군의 아버지와 달리 유명한 뉴스 앵커인 한경배는 자신이 진행하는 뉴스를 통해 사회에서 벌어지는 구태의연한 사건들을 꼬집고 풍자한다. 그 덕분에 시청자의 인기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던 그는 언제나 자신감에 차있고 당당하다. 심지어 형호의 납치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는 침착하다. 하지만 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며 그의 목을 죄기 시작하면서 그의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비굴할 정도로 무너져내린다. 실제와 달리 유명 뉴스 앵커로 변화한 캐릭터는 영화의 극적인 용도, 즉 고발과 경고의 직접적 메세지를 위해서 제작된 캐릭터인 것 같다. 또한 그의 심리적 변화는 한 인물의 심리상태가 극단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통해 전후의 대조군을 형성하고 그로 인해 관객을 압박하기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사실 영화는 극적인 긴장감이 긴박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극의 흐름이 미흡하거나 혹은 이야기의 전개가 느슨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결말부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이 지닌 목적성을 향해 영화가 극의 흐름을 일관되게 끌고나가는 의도덕분이다. 그리고 그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극속에서 뚜렷하게 보여지는 것은 유괴된 형호의 부모, 한경배와 오지선(김남주 역)의 급격한 심리적 변화와 종래에는 공황상태에 이르는 처절함의 정서이다. 극은 관객에게 심리적인 시소타기의 유희를 선사하는 대신 두 인물의 심리가 극도로 내려앉게 되는 중압감을 견뎌내길 요구한다. 영화는 하나의 가정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범인에 의해 패닉상태가 되어가는 부부의 심리를 통해 치열하게 묘사한다. 범인의 요구에 의해 서울시내를 종횡무진하고 전화를 통해 애원하고 분통을 터뜨려도 보지만 결국 그들은 형호를 만나지 못한다. 결국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형호의 싸늘한 주검뿐이다. 44일간의 희망이 결국 시작부터 허구였음을 알게되기까지 끔찍한 희망고문안에서 탈진했던 부부의 사연은 그 사건의 절실함을 감정 토대로 대변한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이 작품은 의심을 얻을만한 여지도 분명하다. 영화가 품고 있는 진위가 영화의 홍보 혹은 관객을 자극하기 위한 방편은 아닌가라는 여지를 완전 부연하기는 쉽지가 않다. 극영화의 토대안에서 이 작품이 내세우는 현상수배극이라는 장르적인 개념의 상을 덧씌운 채 종래에는 영화라는 극의 형태까지도 하나의 진실규명을 위한 호소적 방편으로 활용되어버리는 모양새는 의도의 분명함과는 별개로 영화라는 장르적인 순기능 안에서 논란을 부를 여지도 있다. 물론 영화의 의도를 떠나 해갈되지 못한 진실을 시간이라는 무덤에서 끌어낸 점은 분명 영화가 지닌 사회적 소통 기능을 바람직하게 활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하나의 귀속적인 결론을 위해 영화라는 장르의 고유적인 형태를 훼손한 듯한 인상이 드는 것은 겸연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과감한 방식에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자식잃은 부모의 속타는 냄새. '괴물'에서 희봉(변희봉 역)의 대사 중 등장하는 이 대사는 마치 이 영화에서 확인될 듯 하다. 범인의 추악한 사리사욕에 대한 분노보다도 그 범인의 사리사욕안에서 한없이 이용당하고 내팽개쳐진 부모의 심정이 가슴을 짓누른다. 이는 '살인의 추억'에서 능욕당한 뒤 내버려진 여인들의 사체와 오버랩되는 씁쓸함이다. 물론 이 작품의 바람처럼 범인을 잡는다해도 현재의 법 테두리는 더이상 응징의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인면수심의 천태만상의 행위를 법적 효력이 무색해졌다고 해서 덮어두는 것 역시 인간적인 도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 인간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놈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놈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놈 목소리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이유는 그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대가 이 영화를 보는 그 순간 옆자리에서 자신에게 던지는 그 경고메세지를 보면서 기분나쁜 그 웃음소리를 흘릴지도 모르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섬뜩할 것도 같다. 어쨌든 필자가 하고싶은 말은, '너, 밥은 먹고 다니냐? (그게 넘어가?)'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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