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 임진강이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68혁명이 세계를 휩쓸던 1968년. 미국은 어마어마한 폭탄을 베트남에 마구 퍼붓고 있었고, 흑인 인권의 상징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암살됐으며, 비틀즈는 'Flower Movement'를 상징하는 [Sgt.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란 앨범을 내 놓았다. 히피문화와 포크 뮤직은 당시 젊은이들의 상징이었고, 마약(특히 LSD는 젊은이들에게 의식해방의 수단으로 여겨짐)과 프리섹스가 젊은이들에겐 최고의 가치였다. 이 모든 것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질서와 권위에 저항하는 수단이었다.
젊은 여성들을 사로잡은 그룹 OX(옥스)의 공연이 펼쳐지던 1968년의 교토에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히가시고 학생들과 조선고 학생들 사이의 전쟁. 마치 건드리기만 하면 툭 터질 것 같은 팽팽한 분위기. 일본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장난을 친 조선 여학생이 알고보니 조선고 싸움대장인 이안성의 여동생인 경자. 거리를 달리는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이 탄 버스를 뒤엎어 버림으로서 위세를 과시하지만 이는 또다른 보복 폭력을 불러오며, 끊이지 않는 서로간의 대립과 갈등을 키워간다.
보기 전에 꽤 무겁게 느껴졌던 영화는 오히려 첫 장면부터 젊음의 힘과 열정을 상징하듯 아주 경쾌하고 가볍게, 마치 길거리를 집단으로 뛰어가는 조선인 학생들의 분기탱천한 발걸음을 느끼게 한다. 이는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상징하는데, 일본 학생들의 '옷시'하며 기합을 넣는 장면은 비장하다기보다 마치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 하고, 조선학생들이 길거리나 술집에서 시비거는 모습도 어두움보다는 젊음의 치기로 다가선다.
이 전쟁의 와중에 히가시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코우스케와 요시다는 모택동을 신봉하는 후카와 선생의 지시를 받고 조선고에 평화친선 축구대회를 요청하기 위해 갔다가 우연히 플루트를 연주하는 경자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어렵게 양 고등학교의 친선 축구대회가 열렸지만, 양측의 감정 대립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하지만 코우스케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경자와 사귈 수 있을까에 집중된다.
코우스케는 우연히 레코드점에서 경자가 연주하던 곡이 '임진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히피 청년인 사카자키로부터 임진강에 얽힌 얘기와 노래를 배운다. 박세영 작사/고종한 작곡의 '임진강'은 남북 분단의 슬픔과 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는 노래로 일본에서 1968년 '더 포크 크루세더스'가 일본어 가사로 발매했지만 금지곡으로 선정된 곡이다.('더 포크 크루세더스'에서 작곡을 하던 카토 카즈히코가 이 영화의 음악을 담당했다)
경자를 사랑하게 된 코우스케에게 경자의 국적이나 조선/일본 학생들의 반목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임진강을 열심히 연습해 드디어 경자와 그의 가족 앞에서 노래를 불러 가족들의 환심을 얻게 되고, 안성의 후배인 재덕과 친구 관계로 발전한다. 재덕은 코우스케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해 준다. 가끔 100명 정도의 일본 학생들이 자신을 기다리는 꿈을 꾸고 두려움에 잠에서 깬다는 이야기인데, 재덕이 길거리에서 시비를 먼저 거는 이유는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렵기 때문에 먼저 치고나가야 하는 어쩌면 너무도 단순하고 가장 원초적 모습이야말로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치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리석음이라고 해야 할까? 재덕의 고백으로 조선/일본 학생들의 매일 같은 전쟁은 사실은 민족 감정을 기반한 대립이라기보다는 젊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동세대적 모습으로 전화되어 느껴지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게 수월하게 풀려나갈 것 같던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듯 쉽지만은 않다. 술에 취한 코우스케를 바래다준 경자의 한복을 본 코우스케 어머니의 약간 비아냥 대는 듯한 얼굴 표정은 이후의 새로운 갈등을 예고하는 듯 하고, 일본 학생들의 폭력으로 사망한 재덕의 장례식장에서 터진 조선인 어른들의 코우스케를 향한 일갈은 갈등의 폭발로 이어진다. 조선인 어른들은 코우스케에게 묻는다. '일본은 나가라고 하고 한국은 돌려보내지 말라고 한다' '이코마 터널을 누가 팠는지 아는가?' '국회의사당 대리석 어디서 갖고 와서 누가 쌓았는지 알기는 하나?' 친구인 재덕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장례식에 참석해 있던 코우스케는 비로소 일본과 조선이라는 화해하기 힘든 접경 지역에 자신이 서 있음을 깨닫는다.
마치 임진강처럼 일본인 거주 지역과 조선인 거주 지역을 가르며 흐르는 강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코우스케는 그의 노래를 듣기 원하는 PD의 요청으로 라디오를 통해 '임진강'을 눈물 흘리며 절규하듯 부른다. 금지곡임에도 일본인인 코우스케가 부른 노래는 장례식에 참석한 조선인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오고, 재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학생들과 집단 패싸움을 하던 안성은 간호사인 강자에게서 여자친구인 모모코가 출산했음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조선/일본 고등학생들의 끊이지 않던 집단 패싸움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비로소 휴전 상태에 돌입한다.
이 영화는 시네콰논의 대표인 이봉우와 시네콰논 코리아를 책임지고 있는 그의 여동생 이애숙 남매의 실제 이야기가 많이 스며 들었다고 하며, 약 90% 정도는 실제 있었던 스토리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중심을 잡고 있는 '임진강'은 코우스케가 경자에게 접근하는 모티브를 제공함과 동시에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오다기리 조가 맡은 히피 청년의 설명해서 나오듯 '임진강'은 남북 분단의 상징이지만, 어느 곳에서 임진강이 있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바로 교토의 조선인 거주 지역과 일본인 거주 지역에 흐르는 강도 '임진강'이며, 조선학생들과 일본학생들의 반목과 대립의 사이에도 임진강은 흐른다. 잠깐 언급되었지만 민단과 조총련 사이에도 임진강은 흐르며, 아마도 코우스케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도 임진강은 흐를 것이다. 이처럼 임진강은 화해하기 힘든 현실의 상징임과 동시에 결국은 극복되어야 할 대립을 넘어서는 기제이기도 하다. 마치 경자를 만나기 위해 강을 헤쳐 나아가는 코우스케 처럼.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꽤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의식과는 달리 영화는 전반적으로 아주 경쾌하고 발랄하며, 상당히 유머러스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우리에게 [메종 드 히미코] 등의 영화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일본의 꽃미남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히피 청년이나 젓살이 아직 통통해서 너무 귀여운 '사와지리 에리카'가 연기한 경자의 모습은 이 영화를 보면서 얻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매력이다.(일본인 배우들이 발음하는 한국어가 매우 어색해 거슬리기도 하는데, 달리 보면 재일교포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007 어나더데이의 북한군이 사용하는 한국말보다는 훨씬 낫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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