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극장 70m 대형 상영관에서 고별기념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난 뒤부터 느낀 점은 "대작은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 였습니다. 여하간 스팩타클하고 커다란 스케일을 보여주는 영화들은 영화관의 커다란 스크린에서 볼 때 가장 멋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아무리 집에 5.1ch 오디오를 설치하고 프로젝터를 놓더라도 말이죠.
이 영화 역시 글래디에이터나 블랙 호크 다운 등에서 이러한 대규모 전투신을 맛깔나게 연출해 낸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지휘를 맡았고 반지의 제왕과 카라비안의 해적으로 주가를 한껏 높인 '꽃미남' 올랜도 볼룸이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 때문에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란 생각에 직접 영화관엘 가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런 커다란 스케일의 영화는 역시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는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고, 조금만 더 다듬었으면 글래디에이터를 뛰어넘는 역사적인 시대물이 될 수 있었다는 아쉬움 역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십자군 원정은 하나의 꿈이자 로망, 말 그대로의 전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이 십자군 원정을 정면에서 다룬 영화 역시 그렇게 많지 않음 또한 사실입니다. 곁다리로 다룬 영화들은 많았음에도 불구하구요.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직접 밝혔듯, 이 영화는 균형을 다룬 영화입니다. 십자군을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서양의 인식이 그러하듯 아랍인들을 야만인 + 대악장 * 사탄의 자손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문화와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며 "인간"들이다. 아른 사실을 말입니다. 아랍인들에게도 예루살렘은 성스러운 땅입니다. 통곡의 벽이 있는 곳이며, 마호메드가 승천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을 종교적인 이유가 표면적이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침공" 한 서양인에 맞서 싸운 아랍인들은 전쟁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군도, 살라흐 앗딘도 (서양사람들이 자기네 들리는 대로 써놔서 서양엔 살라딘으로 알려짐) 거대 이슬람 민족을 다스리는 위정자로서 걸맞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점을 지금까지 대부분의 서양 시각에서는 "의도적으로" 무시해 왔죠. 마치 자신의 조상부터 살던 땅을 빼앗기고 그에 맞서 싸우던 인디언을 야만인으로 묘사했던 것과 같이 말이죠.
리들리 스콧 감독이 발리안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또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정치? 종교? 경제? 명예? 대의? 이런 것들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발리안을 통해서 얘기하고 싶어 합니다. 중세시대에 왠 생뚱맞는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그 무엇도 아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게 된 발리안의 모습에 우리는 더 많은 동감을 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코 짧지 않은 2시간 30분의 상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면 덤벙덤벙 띄어넘은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원작은 3시간 30분이라더군요. 노골적으로 "디렉터스컷 DVD를 기대하세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막에서 펼쳐지는 예루살렘에서의 싸움은 왜 리들리 스콧인지를 여실히 알게 합니다 . 후반부의 예루살렘 수성전, 이 하나만으로도 영화를 보는데 바친 2시간 30분과 8000원은 전혀 아깝지 않을 듯 합니다.
다만, 조금은 생뚱맞은 점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점인데도, 당연히 인지할 감독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발리안이 아버지를 따라 가서 영화상에선 '단 한번' 검술 수업을 받았을 뿐인데 최고의 검사가 된다던지, 일개 대장장이가 난데없이 궁궐의 예법을 익히고 나와선 어느샌가 최고의 영주, 최고의 지휘관, 최고의 병법가가 되어버리는 점은 보는 사람들을 좀 당황하게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냥 어느날부터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기사중의 기사가 되어 버립니다. 공주와의 로멘스 역시 구색맞추기로 끼워 넣었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구요. 도데체 악녀인지 뭔지 공주의 캐릭터성이 전혀 없어요. 이런 스토리상에서의 덤벙덤벙 뛰어다님은 글래디에이터나 블랙 호크 다운과 비교해 보면 아쉬움이 크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올랜도 볼룸 뿐만이 아니라 리암 니슨, 제레미 아이언스, 에드워드 노튼 등의 영화 전반을 흐르는 배우들의 호연 역시 볼거리입니다. 최종 평가는 음... 이런 역사물 좋아 하시는 분들은 - 물론 글래디에이터나 브레이브하트보다는 떨어지지만 - 그럭저럭 즐길 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