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이 빚은 끔찍한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그늘에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세계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간 스페인 내전은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이국의 역사라고 치부하기에는 세계적인 파장적 스케일이 큰 참변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현장에서 비극을 목도해야 했던 스페인의 평범한 시민 희생자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념의 폭풍앞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짓밟혀야만 했다. '켄 로치'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 역시 이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영국인 의용군의 실상을 통해 그 현장을 목도한다.
어쨌든 이 영화의 시대배경은 위에서 언급한 스페인 내전을 관통한다. 물론 영화를 보기위해 이런 시대배경을 숙지해야 하냐고 불평한다면 이런 사실을 숙지해야만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쟁이 이 영화의 판타지를 열어야만 하는 근원적 가당성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판타지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환상과 이상에 대한 동경으로 간과하기엔 목소리의 성격이 다르다.
사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속 요정들은 작고 아름다우며 빛이 난다. 피터팬의 팅커벨처럼. 하지만 판의 미로 속의 요정은 그로테스크하다. 요정인 판(더그 존스 역)을 봐도 그렇다. 마치 괴물같은 외모의 판에게서 연상되는 것은 요정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오필리어(이바나 바쿠에로 역)를 판에게 인도하는 작은 요정들이 오필리어의 그림책을 보고 곤충같은 모양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요정의 모양새로 변형되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우리가 설정해놓은 동화의 세계. 그 아름다운 환타지의 허구가 영화에서 인용되지 않는 것은 이 영화의 현실이 아름다움만을 꿈꾸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하기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프롤로그처럼 영화의 오프닝을 채우는 동화속 공주이야기는 이 영화속 판타지의 기반을 이룬다. 오필리어가 보는 동화 역시 우리의 동화와 매한가지다. 아름다운 요정의 모습을 그려낸 동화의 삽화가 보여주는 것은 동화속의 현실은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져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필리어는 판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요정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기괴함.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기괴한 상상력이자 이색적인 공간으로써의 발상적 접근이다.
영화는 경이로울 정도로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선을 일방적으로 긋지 않는다. 마치 마법분필이 원하는 곳에 통로를 만들어내듯 영화속의 판타지는 현실과 무게를 양분하며 목적성을 띨 뿐 앞서거나 튀지 않는다. 공간적 구분마저도 영화는 행하지 않는다. 오필리어는 현실안에서 판타지를 접하고 그 상황 안에서 그 환상과 접속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순간을 어색하지 않게 꾸려나가는 것은 이야기의 능숙함이자 그런 능숙함을 서포트해주는 배경적 요인이다.
해리포터를 통해 아동용 발상이 성인에게 어필될 수 있었던 건 비쥬얼의 무장이었고 반지의 제왕이 고리타분함이 관객을 끌어모은 것 역시 거대한 스케일의 비쥬얼이었다. 그리고 그 판타지의 세계로써 관객이 충만하는 것은 단순히 그 세계에 대한 허구적 상상력의 충만이었다. 현실과의 경계선을 완벽하게 그은 그곳은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에게는 어차피 다가설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일 따름이고 합의된 거짓이다. 하지만 판의 미로는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판타지가 머금고 있는 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로부터 스며나오는 페이소스가 묻어난다는 것이다.
소녀가 공주를 동경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동화속의 판타지로 귀속될 것이라는 유아적 환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개의 난관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어린 소년의 몫으로 얹혀주기에는 꽤나 끔찍한 대목이다. 영화는 그런 난관을 어린 오필리어에게 짐처럼 얹는다. 하지만 소녀는 그 환타지로 가는 난관의 봉착을 고심하지만 맞이한다. 소녀에게 환타지로의 입성은 생각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소녀가 살아가는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잔인하고 냉정한 공화국 장교인 새 의붓아버지가 원하는 아들을 낳기 위해 약한 몸으로 출산을 감행해야 하는 어머니와 내전의 참상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야 하는 오필리어는 자신의 현실안에서 도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필리어는 그토록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판의미로는 소녀 자신이 스스로 인도된 필연적 공간이라고 봐도 무관할것만 같다.
전쟁의 포화에 잠식당한 어린 영혼이 꿈꾸는 환타지는 스페인 내전에 휩쓸려 간 수많은 생명들이 꿈꾸던 이상세계로의 탈출을 대변한다. 특히나 길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인 '악마의 등뼈'를 통해서도 묘사되었던 전쟁의 공포가 심리적으로 세세히 파고 들진 않지만 그 대상이 어린 소녀라는 점에서 구체적인 설명쯤은 거세해도 무관하다. 영화 속의 환타지가 추구하는 현실 도피적 성격의 허구는 그 시절 이룰 수 없었던 정의에 대한 송가와도 같다. 억압과 독재가 힘의 논리에 의해 묵인되고 정의보다는 실리가 앞장 섰던 시대의 폐부는 어린 소녀의 현실로써 처연하게 되살아난다.
역사적 배경이 만들어낸 환타지의 아련함은 기존에 우리가 보았던 신세계의 짜릿함을 되살리진 못하지만 어느시절에 존재했던 비극적 슬픔을 희미하게 나마 상기시킨다. 물론 이것이 이미 지난 세월의 이야기이고 우리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일일 뿐이라고 치부한다면 이 영화의 감상은 쓸때없는 관심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을 짊어진 우리의 역사를 플래쉬백한다면 그 시절의 환타지를 우리도 하나쯤은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는 영화로써의 상상력에 감탄하는 것이 선행된 이후에 이뤄져야 하는 작업이다. 적어도 이 영화의 상상력이 소비지향적 목적의 오락성이 안에서 맴도는 것이 아닌 가슴아픈 시대에 대한 공감대 형성으로 뻗어나간다는 것은 분명한 미덕이다. 오필리어가 통과한 세개의 관문 너머로 들어선 아름다운 환타지의 세계가 결국 짜릿한 즐거움의 쾌감이 아닌 처연한 슬픔의 여운으로 맞닿음은 적어도 이 영화의 상상력이 가르키는 방향이 소비지향적 목적의 오락성안에서 맴도는 것이 아닌 가슴아픈 시대에 대한 공감대 형성으로 뻗어나간다는 것. 그것은 이 영화가 지닌 명료하고도 고결한 미덕임에 틀림없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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